내가 사랑한 이야기 속 누군가

- 들어가며

by 열무샘

한글을 늦게 깨친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에야 겨우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늦되었나에 관해서는 여러 전설과 의견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 글자를 읽기 전에도, 내게는 어떤 그림과 어떤 사람, 사랑했던 이야기 속의 어떤 누군가가 있다. 백설공주다. 큰 나무 밑에 백설공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언뜻언뜻 기억난다. 나는 까맣다. 어릴 때도 까많고, 지금도 까맣다. 까만 건 좋지 않았다. 어른들, 엄마와 외할머니가 나의 까맘에 대해서 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까만 내가 사랑했던 첫 누군가가 백설공주였다니.

문방구에 얇고 작은 검은색 표지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괴도 루팡과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200원이었나, 300원이었나. 어떻게든 돈이 생기면 셜록 홈즈 시리즈 중 한 권을 샀다. 친구는 괴도 루팡이 좋다고 했는데, 나는 셜록 홈즈가 훨씬 훨씬 좋았다. 파이프나 모자, 그의 괴벽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든 결국에 맞히는, 어떤 사건이든 해결하는 셜록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나는 셜록 홈즈를 사랑한다.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속 히드클리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몇 사람이 떠오른다. 사춘기의 나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같이 좋아했다. 지금 나는 제인에어도 히드클리프도 스칼렛도 별로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며>의 ‘그’. 여자 친구의 자살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를 나는 필사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를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그’를 만든 소설가 김연수를 사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드라마와 동화 속 주인공 삐삐, 웨이싸이드 학교의 악동들, 존버닝햄 그림책 속의 혼자 있는 아이, 아기 그림책


<싹싹싹>에서 활짝 웃는, 아들을 닮은 아이. 내가 사랑한 아이들. 언제부터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을까?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키키 키린. 그녀는 결코 인자하고 훌륭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스릴러 소설의 몇몇 주인공. 스밀라와 미스 마플, 세상을 다 알아버린 표정의 약에 찌든 형사. 셜록 홈즈를 사랑했던 때부터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나’이구나 싶다.


처음 <내가 사랑한 누군가>를 주제로 글을 써야지 했을 때는 몰랐는데, 이번 글쓰기도 또 나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겠구나 싶다. 언제쯤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건 환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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