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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Feb 12. 2022

mine, 채굴, 보물 혹은 지뢰

문화, 결과가 아닌 과정 

첫해 생활문화 공모 사업의 제목은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였습니다. 민망할 만큼 솔직한 제목이었습니다. 공모 심사위원이 이런 촌스런 선언을 하는 이유를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 가을 사업 제목을 임으로 바꾸었습니다. 역시 선언이었습니다. 'HAPPY LIFE HAPPY MINE' 결과 전시회를 기획한 후배가 물었습니다. 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냐고. 장황한 답을 했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투박함과 유아스러움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후배가 말했습니다.  mine이 광산이나 채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 아냐고. 몰랐습니다. 그때는 그랬지요. 아,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구나. 괜찮을 거야. mine의 대표적인 뜻은 '내 것이'잖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또 생각이 없기도 합니다. 작년 여름 기후 위기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2회 차 정도의 수업이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려 보니 기후 위기의 '위'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부랴 부랴 기후 위기와 관련한 예술작품을 검색하고,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기후 변화 시대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단 소설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굴과 탑>은 소설집 중 한 편이었습니다. 가난한 두 남녀가 기후 변화와 함께 찾아온 위기와 절망을 각각의 방식으로 견디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사람은 계속 계속 굴을 파고, 한 사람은 계속 계속 탑을 쌓습니다. 두 사람은 권력과 사회의 위험 인자가 되어 죽음을 맞습니다. 

'띵'하고 종이 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언가 아득한고, 무언가 슬프고, 무언가 흐릿하고, 반대로 명확해 보였습니다. 기후 위기랑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급한 공부의 결론은 기후 위기에 필요한 건 '상상'과 '실천'이었으니까요. 갈 길은 멀고 어렵지만 목표가 정확하니, 당장 해야 할 목록을 정하면 된다고 판단했으니까요. 

띵, 띵.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굴을 파는 심정으로 살아야겠다고 막연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글쓰기 밴드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굴 파는 심정에 관해 떠올렸습니다. 모르겠구나. 내 삶도 모르겠고, 타인의 삶은 정말 모르겠구나, 예측으로 안정감을 확보하는 내가 멍청해 보였다가, 그럼에도 안전하기 위해서 예측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따뜻하고 감동적인 결말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앵두의 글 중에서 '나의 것'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난다가 쓴 댓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시작부터 버팀까지 온전히 나의 것'


정말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mine은 '나의 것'이라는 뜻과 '광산과 채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걸, mine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걸까요? 어쩌면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생활문화의 선언으로 HAPPY MINE이라는 문장을 사용한 문화기획자가 뒷걸음을 치다 뭔가를 밟은 해프닝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돌아온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 여가를 만들기 위해서, 보다 나은 나를 위해서, 답답해서, 가만있는 자신이 싫어서, 미칠 것 같아서, 우리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습니다. 이 문화적 실천에서 가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결과를 확인하고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글, 잘 그린 그림, 나를 인정하는 책 읽기 등등. 기획자인 저는 종종 그렇습니다. 요즘 마을기록과 관련한 공모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벌써부터 공모를 받지 못할 경우 다음 스텝은 무엇인지, 스크래치 입은 자존심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궁리합니다. 그러다 드로잉 밴드의 그림을 보거나, 글쓰기 멤버의 글을 읽고 정신을 버쩍 차립니다. 잘하고 못하는 건 없다고 얘들한테 잔소리하면서 너 뭐하니 하고. 

공모사업을 준비하는 기획을  mine에 적용해 봅니다. 붙고 떨어지고는 상관없다, 혼자 길가다 사진을 찍고,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다이아그램을 그린다고 파워포인트 작업에 서너 시간을 쏟는 과정이  mine입니다. 내 것이기도 하고, 채굴하는 일입니다.  

공모사업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들과 책을 만들어야 할 올 한 해의 시간, 재정적 어려움을 안고 가야 하는 새로운 시도, 아픈 노모의 이사, 또, 또, 또. 기후 위기도 있고, 언젠가 만나게 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그 모든 게 나의 것이자 채굴입니다.


띵, 띵, 띵.


삶의 모든 건 굴을 파는 심정을 비켜나가지 않아 보입니다.  


아이들은 반짝이는 보물을 좋아합니다. 보석 그림도, 보석 모양의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을 좋아하고,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행복해합니다. 보물이면 좋겠습니다. 굴을 파는 시간 동안 발견할 수 있는 게 보물이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짖꿎습니다. mine은 보물 창고라는 뜻과 지뢰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굴을 파면서, 굴을 파는 중간중간,  보물은 커녕 지뢰를 밟을 수 있다니. 하느님에게 물어보고 싶군요. 

왜, 왜, 왜. mine이 지뢰를 왜 품어야 하나요?  

답은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삶이 그러하니까요. 내 것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처음과 버팀의 과정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 하나의 그림책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그림책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계속 계속 땅을 파는 샘과 데이브, 용케도 보석을 피해서, 보석을 캐려고 땅을 파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결국 보석을 캐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슬아슬 보석을 피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꼭 저 같습니다. 그림책은 사랑스럽게도 그 두 사람의 환한 얼굴과 알듯 모를 듯 바뀐 집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질문을 다시 할 수밖에요. 무엇이 보물이고, 무엇이 지뢰인지.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지뢰를 만나고 싶지는 없습니다.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 무언가를 하면서, 얼기설기 서로를 확인하고 있으니, 우리는 각각 굴을 파고 있다는 걸, 그래서 다행이다 싶어요.


두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라 또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요.


이상 열무의 편지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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