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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Feb 05. 2022

근사 해지는 나와 너

문화기획, 문화로 관계 맺기

저는 아이한테 가혹한 벌을 내렸습니다. 아이가 번번이 놀이 규칙을 어기는 바람에, 놀이가 계속 망가졌습니다. 화가 난 다른 아이들이 아이를 놀이에 빼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저는 아이에게 그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놀이에 참가할 수 없다는 요구를 하루로 줄이기는 했지만, 아이에게 하루는 너무 길었습니다. 한참 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마피아 하고 싶어요." 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안 돼." 아이는 한 숨을 쉬다 혼자 피아노를 치다가 색종이 접기를 하다가 방과 후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떼를 쓰면 너도 마음이 안 좋을 거야라고 했던 제 말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외롭고 슬퍼요."  작은 방 책상을 의자 삼아, 아이들의 놀이를 구경경하던 아이가 제 곁에 다가왔습니다. 아이는 참 작았습니다. 아이가 뜨게 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아이만큼 작은 목도리, 얼기설기 늘었났다 줄어든 분홍색 목도리였습니다. 어느새 아이가 한 줄, 내가 한 줄을 뜨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앉아서.

아이가 문득 말했습니다.

"나는 깔마를 사랑해요."

뭐라 대답할지 몰랐습니다. 사랑한다는 게 뭐야라고 질문할 뻔했습니다. 내 옆에 앉은 아이가 얼마나 어리고 작은지 까먹고 말입니다.

"나도 너를 사랑해."

아이가 웃습니다.

"나는 딸기도 사랑하고, 은하수도 사랑하고 교사들을 모두 사랑해요." 그리고 아이는 방에서 놀던 모든 아이의 이름을 호명하며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이에게 놀이를 빠지라고 말했던 아이들인데 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마음이 꽉 찼네."

"무슨 뜻이에요?"

"마음이 꽉 찼다는 건,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서 든든해진다는 거야."

아이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를 사랑하고 교사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아이의 마음이 꽉 차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마음이 너무 텅텅 비어서, 바람이 들고 구멍이 쑹쑹 나는 바람에 모두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뜨개질을 하면서 나누었던 그 짧은 대화의 시간만큼은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라는 단어, 나를 사랑하자는 문장, 저한테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문장이었습니다. 나라는 게 뭐지, 사랑이 뭐지, 나를 사랑하자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등등. 나는 모든 복잡함의 총체이자, 총체를 넘어서 무한의 복잡함과 연결된 존재인데, 뭐 그런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답 비슷한 걸 얻었습니다.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차츰차츰, 어느새, 언제인지도 모르고, 살다 보니.

누군가와 있는지에 따라,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저는 달랐습니다. 어떤 저는 지극히 냉소적이고, 어떤 저는 명랑하고 유쾌했습니다. 명랑하고 유쾌한 저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아이들,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 저는 마음에 드는 저였습니다. 어른들은 반반. 와, 반반이면 다행인데,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제가 반에 반도 안 될 것 같지만 아무튼.

여러분은 누구랑 있을 때, 누군가 관계를 맺을 때, 자신이 마음에 드세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누군가는 바로 우리를 근사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중요한 하나가 남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무섭게 야단치는 어른입니다. 특히나 방과후 교사일 때는 더 그렇습니다. 인공지능 수준으로 야단을 치기에, 감정적으로 특별히 힘들지는 않아요.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제와 규율을 중요시하는 제가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닙니다. 제 마음에 드는 저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거나, 아이한테 마녀 모자를 씌우고 기숙사를 배정해준다느니, 마법 주문을 만들자느니 야단법석을 뜨는 쪽입니다. 그럴 때 저는 꽤 근사합니다.


근사한 저를 만드는 건, 누군가이기도 하지만 '무엇'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대화를 나누고, 무엇을 함께 하고, 무엇으로 만나는지, 무엇을 매개로 관계를 맺는지, 그 무엇이 저를 근사하게 만들기도 하고, 참 마음에 안 드는 저를 만들기도 합니다.  


동네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였습니다. 아 동네에서 관계를 맺으려면 술을 마셔야겠구나 생각하니 아득했습니다. 저는 술자리에서 못 먹는 술을 마시고 말을 하는 제가 별로입니다. 술자리는 저를 날카로운 관찰자, 세상을 공허하게 바라보는 피곤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저는 방과후 노동자라, 이런저런 회의로 사람을 만납니다. 회의 때 저는 재수 없습니다.(아마 이 글을 읽는 방과후 교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지 싶습니다) 재수가 없지만, 한 편으로는 유능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일'을 매개로 누군가를 만날 때 저를 좋아하는, '일' 중심적 사람입니다.

고백합니다. 방과후 교사가 되고 나서, 한 달가량, 일 년 후, 이년 반 즈음에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계속 일을 하게 만든 건, 제 마음에 드는 저였습니다. 아이들과 깔깔거리며 재미있어하는 제 자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일 년 전부터 다른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글을 쓰고,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보고, 한 마디씩 덧 붙이고, 불쑥 이벤트를 제안하고, 이벤트 선물을 고르고, 기록을 하자며 수다를 떨고, 수다 떨다가 문득 아 이거구나 하고, 이 모든 걸 도와주는 기획서를 쓰는 제가 괜찮아 보입니다. 가끔은 "나 좀 근사하네" 싶기도 합니다.


그래요. 누구만큼 무엇도 중요합니다.

     

아이에게 엄격한 규칙을 내린 제게, 아이는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어른인 제게 여러 판단을 요구했지만,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이와 저 사이에는 뜨개질이 있었습니다. 아이만큼은 아니더라도 뜨게를 잘하지 못하는 제가 아이랑 한 줄, 한 줄 교대로 목도리를 뜨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뜨개질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궁리해봅니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을 도서관에서 고르거나, 활동 시간에 수다를 나눌 질문 카드를 챙깁니다. 동네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나, 이런 걸 어떨까 저런 건 어떨까,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내 인건비도 벌어야지 하면서 공모 계획서를 마주합니다.


근사한 저를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문화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근사한 사람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와 무엇을 하냐에 따라 근사 해지는 나와 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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