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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Mar 12. 2022

숙제를 떠안는 일

기록하는 일

숙제가 모두 싫지 않았습니다. 일기는 싫었고, 독서 감상문은 좋았고, 바느질은 최악이었고, 미술은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숙제는 행복했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을 모눈종이에 그리는 게 숙제였습니다. 내 방을 어디에 둘까, 방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궁리하는 일도 재미있었고, 설계가 아닌 설계 플러스쯤 되는 방 안에 가구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까 그리는 일은 신났습니다. 돌아보면 집 하나를 지어서 집을 팔던, 1970년대 집 장사 아버지 딸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방과후 아이들은 숙제가 싫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놀고 싶기 때문입니다. 놀이터가 있고, 친구가 있고, 각종 놀이 재료가 그득한데, 숙제라니 싶은 가 봅니다. 정말 싫을까 싶어 살짝 바라보면 꼭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이 간간히 보입니다. 그렇지 놀고 싶은 욕구가 그득그득해서 그런지, 숙제가 징글징글 싫은 건 아니지 하고 말을 걸고 싶습니다. 


약속한 대로 글을 쓰는 일, 약속한 대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더해서 요즘은 약속한 대로 기록하는 일이 숙제입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한 약속이기는 하지만, 이 약속은 헐겁습니다. 꼭 안 지켜도 됩니다.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나하고 한 약속은 어떤가 생각합니다.  나랑 약속은 가능한 지키는 편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거듭나야지! 는 아닙니다. 운동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스트레칭을 하겠다는 약속은 사흘을 넘기지 못합니다. 약속도 잘 안 합니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라는 걸 경험으로 아니까요. 무엇보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약속을 떠올리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서,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저하고 새로운 약속을 했습니다. 배달 음식 먹지 않기입니다. 기후 위기, 지구를 위해서 맞고, 경제적 이유도 맞고,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전에도 지구가 종말로 간다고 생각했고, 돈은 언제나 모자랐고,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시작은 어떤 장면이었습니다. 배달음식을 한 참 시켜 먹었던 중간쯤, 우리 집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가득한, 삐져나오다 못해, 다른 봉투를 필요로 한 딱 그 장면에서, 머리에서 땡땡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음을 먹고 이유를 찾았지요. 기후 위기와 돈과 건강을. 

처음은 가뿐했습니다. 머릿속 땡땡이 원동력이 되어서 배달앱을 찾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서는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켰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나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 가끔 덕분에 저는 이 새로운 약속이 즐겁습니다. 안돼, 절대 안 되라고 했다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아마 포기했겠지요.     

기록이 숙제가 된 과정도 비슷합니다. 기록하고 싶은 어떤 대상이 생겼고, 기록을 하기로 했고, 약속한 대로 시간을 정해서 기록을 하고, 그 시간이 저의 리듬이 되고, 가끔 숙제를 하지 않습니다. 가뿐하고 가볍고 날렵한 재미있는 숙제입니다. 


이번 주 월요일 숙제를 하느라 바라본 집 앞에서, 저는 어떤 점프를 요구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책임. 집이 나에게 거는 말은 사실 집과 연결된 사람의 말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비슷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어떤 세계에 속한다는 일, 나와 다른 이를 특별하게 맞이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집을 찍고, 집을 관찰하는 일주일에 한 번, 딱 그것뿐이었던 일도, 더 큰 걸 요구합니다. 정성, 시간, 어려움, 애씀 등등.     


역시 숙제였어요. 재미있고, 즐겁고, 가볍고, 날렵해도 숙제는 항상 또 다른 걸 요구합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은 걸 참고 숙제를 하듯이, 조금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어려움을 견디고 애를 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열심히는 모르겠고, 견디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고, 간간히 안 하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저에게 찾아온 숙제를 떠안으려 합니다. 

일기가 아니라 독서 감상문 정도라 얼마나 다행이야 하면서요. 집 도면 그리기처럼 신났으면 좋겠다는 불가능한 희망을 가지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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