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정말 미안해.

by 열무샘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떠밀었지요. 그리고 정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 마가렛 대처



기억

잊고 싶다. 잊을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잊고 싶다. 잊으면 홀가분할 것 같다. 기억을 쫓아내면 홀가분하다는 느낌도 없어지겠지. 자연스럽게, 그냥, 오늘 아침 식탁 메뉴처럼 내일과 모레가 되면 머릿속에서 사라지겠지. 그러면 좋겠다.


달팽이

도서관에서 주최한 축제였다.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사물놀이 공연 때였다. 악기 소리에 고개와 몸을 흔들던 내 눈에 기묘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운동장 조회대 옆, 축제 때 사용했던 빈 상자 안이었다. 검은 운동복을 입은 누군가가 있었다. 안경을 낀 아이였다. 아이는 상자 안에서 제 몸을 구겨놓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축제가 끝나고 정리를 할 때까지 아이는 꼼짝없이 상자 안에 있었다. 달팽이 같았다.


검은 운동복에 안경을 낀 아이가 도서관에 들어왔다. 이름이 제민이었다. 제민이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대며, 동생들에게 놀자고 하거나 친구들이 책 읽는 걸 방해했다. 도서관 규칙을 위반한 제민이를 야단치자, 기가 팍 죽어서 잘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서관에 오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제민이는 점점 더 심해졌다. 욕하고, 때리고.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 저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뛰어 가보니 제민이 손에 과도가 있었다.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제민이를 달래서 과도를 받았다. 아이들과 싸우다 화가 나서 집에서 과도를 가지고 왔다고 했다. 제민이 엄마가 도서관에 왔다. 엄마는 연신 사과를 하고 제민이를 데려갔다.

제민이 오른쪽 눈. 눈동자가 한쪽으로 몰려 있고, 눈 전체는 찌부러졌다.


도서관 밖이 시끌벅적했다. 불이 났다. 골목 안 다세대 주택 1층, 문 앞에 놓인 택배 물품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아저씨들이 물을 붓고, 할머니와 아이들이 구경을 나왔다. 범인을 잡았다. 제민이었다. 아저씨 한 분이 ‘네가 그럴 줄 알았다며’ 아이를 잡는 걸 말리고 제민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제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간 뒤, 도서관 문을 닫을 때쯤이었다. 제민이가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 앞을 휙 지나갔다. 뭐가 좋은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얼굴에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제민이는 그날 불을 질렀다.


계단 앞

도서관 계단 위에 여고생이 앉아 있었다. 제민이 누나였다. 제민이 누나가 말했다고 한다. 동생이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엄마도 소용없다고, 아빠는 재민이를 싫어한다고.

제민이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아버지가 난폭해 보여요. ADHD 약을 먹는다는 데 나아지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누구한테 맞든 맞는 건 확실해요.


부침개

제민이는 도서관 선생님인 우리말을 잘 들었다. 우리는 싸움이 일어나면 제민이 말을 우선 들어주고, 따끔하게 야단을 친 후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다. 제민이는 도서관에서 동생들과 노는 걸 좋아했다. 유치하게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얼굴은 싱글벙글 이었다. 프로그램에도 자주 들어왔다. 큰 비닐에 시트지를 붙여 옷을 만들어 입었다. 벽 밑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멋진 포즈를 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서관 베란다에서 부침개를 해 먹었다. 아이들이 뜯은 봄나물 조금과 슈퍼에서 산 부추 이만큼을 밀가루와 반죽한 부침개. 아이들은 순서대로 부침개를 부쳤다. 제민이 차례였다. 앞 면 가장자리가 노릇노릇 부쳐지자, 부침개를 회전시키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말렸다. 부침개가 땅에 떨어지는 참사를 막기 위해서. 제민이가 조르는 통에 허락을 했다. 모두 제민이를 쳐다보았다. 제민이가 심각한 얼굴로 프라이팬 손잡이를 흔들었다. 그리고 부침개를 하늘 위로 올렸다. 빙그르르. 하늘에서 공중회전을 하던 부침개가 얌전히 프라이팬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박수를 쳤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어떤 사건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와 여섯 살 여자 아이, 남자아이는 또래보다 지능이 떨어졌고, 여자 아이는 밤늦은 시간까지 언니와 단 둘이 있어야 하는 아이였다. 장난 같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우리는 놀랬고, 당혹스러웠고, 미숙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엉성하게 사건이 해결된 후 여자 아이와 아이의 언니는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제민이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아이들이 알려 주었다. 학교 복지사에게 상담을 하자 조심스럽게 접근하자고 했다. 그때 학교는 성추행 사건에 예민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배려한 조처 같은 건 없었다. 제민이 부모님께는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제민이 엄마와 아빠를 믿을 수 없었다.

작지만 불쾌한 사건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까지 제민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민감하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졌다. 결국 제민이는 우리들 중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파출소 앞까지 갔다. 아이를 파출소에 데려가서 협박을 하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때 우리는 말했다.

파출소에 가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신호

불을 지르고, 성적인 장난을 하고, 싸우고, 거짓말 하고, 과도로 친구를 위협하고. 제민이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랐다. 타인을 존중하는 걸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것 같았다. 제민이는, 제민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존엄’, 생명보다 귀중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게 뭔지 몰랐다.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지키는 건 언제나 가능한 게 아니다. 폭력과 방치, 소외와 허기, 공포와 무기력 속에서, 세상을 존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때 제민이는 내게 신호를 보냈다. 도와달라고. 달팽이처럼 몸을 말았을 때부터. 대답했어야 했다. 그건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였다. 하지만 나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만약에 혹시나 제민이에게 용서를 청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잘 못했다고, 그 때 나는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다고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제민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