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지 않기
괜찮지 않아. 괜찮다고 하지 않아도 돼.
a가 떡볶이 국물을 b의 공책에 엎질렀다. 이상했다. b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가만있고, a는 과장된 목소리와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나!” 그리고 끝. a는 다른 아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b가 공책을 닦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다른 아이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a를 불렀다. “네가 엎질렀잖아.” a가 톡 쏜다. “그래서 어쩌라고.” 짜증이 났다. “같이 닦아야 되는 거 아냐?” a는 내 말을 무시하고 다른 아이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b는 계속 공책을 닦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주춤거리는 사이, 그 때 내가 주춤거리지 않았다면, a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a가 보이지 않자, b가 나를 원망한다. “나는 괜찮은데, 왜 깔마가 뭐라고 해?” 멍해졌다.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또 나는 주춤거렸다.
c가 방 안에서 혼자 글자로 그림을 만들고 있다. 아름다웠다. c가 내게 자랑을 했다. d가 방에 들어왔다. d는 c의 글자 그림을 흘깃 보더니, 글자로 그림을 만든다. 금방 글자그림을 완성한 d가 c에게 자기 작업을 보여주며 말한다. “봐, 잘했지? 넌 못했어.” 나는 c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d를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여기서 고백. c와 d는 내게 불편한 아이다. 몇 가지 이유로, 다가가기 힘들었고, 다가가기 힘들어서 다가가지 않았다. 반대일 수도 있다. 다가가지 않아서, 다가가기 힘들 수도 있다. c와 d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두 아이 얼굴을 모두 봤을 테고, d의 반응에 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가 아닌 보다 구체적인 표현을 썼을 것이다. 심술궂게도, 의기양양한, 복수하는 심정으로 등등. 하지만 나는 c와 d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이 적었기에, c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d의 표정과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교사다. 이런 상황에서 넋을 놓는 건 아니다. d가 c를 놔두고 방을 나갔다. 그제야 c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느낌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얼굴로 c가 앉아있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주춤거리다, c에게 말했다. “쟤 왜 저러니? 잘했기만 했구만.” c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알아. d는 원래 저래.” c는 나를 놔두고 방을 나갔다. 방안에는 나밖에 없다. d는 뭐고, 무엇보다 c는 뭔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다양한 감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로 갈등을 만들고, 관계가 무기가 되는 아이들의 사이에 개입하는 일은 어렵다. 교사는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한 아이를 위해 한 마디 했는데, 아이는 또래 사이에서 “다시는 안 놀아.”라는 말을 듣고, 소외와 배제를 경험한다. 그 아이는 “아무튼 교사들은 멍청해.”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저 아이들 사이에 끼다니.” 교사는 종종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끼어야 한다. 상관하고 간섭하자는 게 아니다. 적절하고 유효한 형식을 찾아야 하는 건 물론, 현재 상황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교사의 포기는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낳는다. 구르고 굴러서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 눈뭉치처럼.
끼어야 하기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우선은 알아야 한다. 아! 문제는 잘 모르겠다는 사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이해하기 싫다는 것.
티비를 봤다. 스무 살 아기 엄마가 나온다. 코 피어싱과 비니 모자, 엄마는 철이 없어 보인다.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기가 많이 아프다. 태어나자마자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아이다. 수술을 앞둔 아이의 몸이 뜨거워졌다. 열이 많이 올랐다. 의사가 수술을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스무 살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예, 알겠습니다.” 모두 수군거린다. 철딱서니 없구나, 아기 엄마라고 할 수가 없어, 스무 살 애송이가 아이를 낳았으니 역시. 아무도 없는 병실 앞에서, 아기 엄마가 펑펑 울고 있다. 의사가 다가가서 말을 건네자, 애송이 엄마가 울먹이며 이야기한다.
“내가 만약 울면 다들 그래요.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몰라서 울기만 한다고. 그래서 의연한 척 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어요.”
의연한 척. 가족의 죽음 앞에서 의연하기, 모욕을 당해도 의연하기, 대학 시험에 떨어져도 의연하기, 암에 걸려도 의연하기, 의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도 잘 그런다. 괜찮아, 그러니 말 시키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진짜 괜찮지 않으면 뚝 잘라서 말한다. 혼자 있을게, 일단은 혼자 있고 싶어, 말 시키지 마. 오랫동안 괜찮은 척, 의연한 척해서 그럴까, 이제는 진짜 괜찮고 진짜 의연해진 것 같다.
나의 괜찮은 척, 의연한 척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떤 기질과 어떤 상황이 만났을 테고, 어떤 태도가 몸에 탑재되었으리라.
아기 엄마의 저 의연한 척도 그런 것일까? 기질과, 상황과, 태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아니다. 엄마는 갓 낳은 아이의 아픔에 무너지고 있다. “아플 수 있다면, 내가 아이 대신에 아프고 싶어요.”라고 울부짖으면서 의연한 척 하고 있다. 아이 엄마가 스무살이라고 해서, 아이 엄마가 코에 피어싱을 했다고 해서, 그녀에게 울지 말라고, 힘든 척 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너는 어리니까, 철딱서니 없는 아기 엄마라는 전제를 두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슬픔은, 괴로움은, 안타까움은, 무너짐은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아직도 a와b, c와d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이다. 방과후에는 더 많은 a와b, c와d가 있다.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괜찮은 게 아니야, 너는 화를 내고, 속상해하고, 기분 나빠해도 돼. 괜찮은 게, 의연한 게 바람직한 게 아니야. 화를 낼 일, 속상해 할 일, 기분 나빠해야 할 일이 있어.
언제쯤, 아무렇지도 않게, a와b, c와d 사이에 끼어 말할 수 있을까. 괜찮은 척 안 해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