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번역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30년보다 더 긴 3분

by 열무샘

“너 아빠 없니?”

“아냐. 아빠 있어.”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아빠가 없다. 하지만 아빠가 있다고 대답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보았다.

3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집까지 올라가는 길이었다. 회색 시멘트 바닥, 양 옆으로 가게와 약국과 목욕탕이 있는 길이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질문을 하지 않는 친구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화가 난 얼굴로 나를 보았던 친구의 옷은 기억난다. 검정과 흰색의 체크무늬 셔츠였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36년 전이다. 30년이 더 지난 일이다. 3분 남짓의 그 시간은 30년보다 더 긴 시간으로 내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창피함, 부끄러움이었겠지? 아빠가 없다는 사실은 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되었을까? 그리고 친구의 화가 난 얼굴을 보면서 난 어떤 감정이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혹스러움? 안절부절? 수치심? 수치심과 가까웠을 테다. 발가벗고 누군가 앞에 서 있는 기분, 내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 친구 앞에서 거짓말.

갑자기 궁금해진다. 친구는 정말 화가 났던 것일까? 내가 거짓말을 해서, 거짓말에 화가 나는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그 친구 역시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나처럼. 화가 났다고 판단한 건 ‘나’의 의식이지 않을까?

조금 더 나간다. 발가벗고 누군가 앞에 있는 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일까? 아기는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어떤 소수부족도 복장과 나신에 관해서 개의치 안흔다. 역시 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못 참는 건 사회화, 어떤 문화의 영향일 뿐이다.


<다소 곤란한 감정-어느 내향적인 사회학도의 섬세한 감정 읽기>(김신식 지음)는 감정과 관련한 소통, 표현을 ‘번역’으로 표현한다. ‘감정 번역’, 낯설기에 오히려 적절하게 다가오는 단어다. 책은 “감정번역이 정확한 언어로 정답의 감정을 도출해 내는 실천이 아니다”고 말한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아빠가 있다고 말했던 나의 감정이 ‘부끄러움’이고,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 느끼는 감정이 ‘수치심’이었다는 걸 정답이라고 말하는 게 감정번역의 일이 아니다.

“감정번역은 당신과 내 앞에 존재하는 대상, 그 대상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기서 비롯된다.…(중략)…속뜻을 구분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건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어떻게 억울함을 주조하고 있는가, 세계를 감각해 내는 이론이다.” -<다소 곤란한 감정> 중

팽팽한 공기, 아빠가 없다는 건 문제 상황이라는 걸 암시하는 질문, 한 부모 가정은 완벽하지 않을뿐더러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문화, 친하지만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춘기의 우정, 거짓말을 하는 건 비윤리적이라는 강요, 너는 왜 화가 났어라고 물어볼 수 없는 관계 형식이 만들어 낸 3분이었다. 그렇게 3분은 30년 보다 더 길어졌다.

a가 짜증이 난다며 집에 가버렸다. 이렇게 저렇게 확인해보니, a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아빠가 없다는 걸 말하는 게 화가 났다고 한다. 나를 포함한 교사들은 사실을 공유하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교사들 중에는 나처럼 어린 시절 아빠와 헤어진 이도 있고, 유독 연민을 많이 지닌 이도 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이런 저런 감정을 느꼈으리라. 나는 a가 안타까웠다. 아빠가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른이니까. 경험했으니까, 별 문제 아니야, 그냥 그런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방과후에는 한 부모 가정 아이가 꽤 있다. 아이들끼리 아빠가 없다, 엄마가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른 말한다. “깔마도 아빠 없어.” 나는 안다. 그 긴장감을, 설명할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어색하고 팽팽한 순간을, 그러니까 얼른 말한다. 나의 얼른 역시 ‘긴장’을 견디고자 하는 반응이리라.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신기했다. 순식간이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아무도 나를 연민 혹은 하대의 눈빛으로 대하지 않았다. 내가 마주하던 세계가 달라졌다. 세계만 달라졌을까? 그 세계는 ‘결핍’을 가진 이를 환대하던 세계였다. 나는 농촌의 아들이, 가난한 광부의 딸이 부러웠다. 딱히 자랑할 수 있었던 결핍이 없었던 내게, 아빠 없음은 세계에 진입할 무기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내 감정을 번역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30년보다 더 긴 3분을 이해하는 일은 수월하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번역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a는 정말 화가 났을까? 자신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해소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없는 다른 아이는 a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왜 a는 화를 냈을까? a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무엇보다 방과후 안에서 a가 마주한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감정 번역을 통해 당신과 나. 누군가의 감정 표현에서 다른 이는 감지하지 못한 감정을 만나게 된다.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의 존재를 곱씹게 된다. 감정이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한 목표성에 기반을 둔다면, 감정번역은 누군가의 내게 이런 언어로 표현될 만큼 가닿았다는 확신을 경계하는 시도다. 감정번역은 누군가의 감정이 내게 혹은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가닿았다’라는 확신으로 인해 간과했던 다른 감정을 눈여겨보려는 의지다.” - <다소 곤란한 감정> 중


a를 떠올린다. 역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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