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그리고 경쟁
“복수하는 거야.”
a가 자기보다 작고 마른 아이를 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복수. 내 작품을 망가뜨렸으니까 복수하는 거야,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니까 복수하는 거야. “의도적인 게 아니잖아”라고 물어봤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a가 말한다. “그렇네.” 문제 하나를 해결했을 뿐이다. 너는 상대방의 행동을 오해한 거야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여전히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게 한다면, 복수를 해도 되는 걸까. 이야기가 길어진다. a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어른에게 당한 폭력적 훈육을 말하며, 복수에 관한 자기 논리를 펼친다.
“이기려는 게 왜 문제야.”
경쟁, 경쟁, 경쟁. 경쟁을 멈출 수가 없다. 이제까지 만났던 어떤 아이들보다 경쟁적이다. 이제까지 아이들의 경쟁적인 모습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경쟁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심하다. 무엇이든 잘해야 하고, 무엇이든 많이 가져야 하고, 무엇이든 좋은 걸 가지려고 한다. “이기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질문에, 눈이 동그래져서 대답한다. “이기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이기려는 게 왜 문제야.”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소유와 경쟁과 자본주의와 욕망과 멈춤에 관해서 말해야 하나. 겨우 답을 했다. “이기는 데 신경 쓰면 계속 이기고 싶어서, 놀이가 재미없어질 거야.” 아이는 시큰둥하게 답한다. “그래?”라고.
아이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면, 아이들의 복수와 경쟁에 관해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훈육에 관한 잘못된 믿음, 인권 침해, 가부장적 권력의 문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환경, 무한 욕망으로 구성된 자본주의 사회.
그러나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아이와 둘러싼 난감한 상황에서, 방과후 교사들은 유혹을 느낀다. 아이의 분노가, 불안이, 폭력적 행동이, 짜증이, 희열이, 흥분이,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의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고 싶어 진다. 부모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부모가 그런 사람이니까 등등. 책임 소재를 부모에게 돌리면 안심이 된다. 어쩐지 아이의 문제를 풀 수도 있을 것 같다. 못 풀어도 상관없다. 내 책임이 아니니까.
역시 나는 아이와 함께 있다.
복수와 경쟁에서 기쁨을 느끼는 당사자는 아이다. 부모가 가정이 학교가 사회가 대중매체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나는 복수를 해야 의기양양해지는, 다른 사람을 이겨야 안정감을 느끼는 아이와 대면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아이의 감정은 아이의 책임이다. 미성년이기에 어른이 법적 책임, 사회적 책임을 대리할 수는 있지만, 감정이 만들어내는 구체적 상황을 마주하고, 행동하는 당사자는 아이 그 자신이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다른 아이와 어울리지 못하고, 짜증으로 번번이 놀이를 방해해서 놀이에 끼지 못하는 아이를, 어떤 부모도 교사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방과 후 교사이기에,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어떤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론은 있다. 사람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에, 사물에, 타인에 주의를 돌린다. 그리고 어떤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이 감정은 경험이 된다. 아이가 복수와 경쟁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도록, 다른 경험을 제시해야 한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일이다.
저 결론이 너무 멀찍이 있어서, 결론으로 가기까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을 뿐. 멀고 어렵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