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선사받는 공감

투명하고 간결한 직관

by 열무샘

“나한테 이야기를 읽어줄래?”

나는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애는 그런 질문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 애는 숲속의 요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속옷 차림에 땀으로 번들거려 더러웠기 때문에 물개 새끼처럼 보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꺼져.”

나는 말했다.

“애들을 안 좋아해?”

“난 애들을 잡아먹어.”

그 애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났다.

“살루부티트, 거짓말하고 있네.”

내가 지나갈 때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중


아이와 어른 중 어느 편이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이.”라고 답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어떤 종류의 불편함을 안겨준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타인은 긴장을 요구한다. 다만 그 불편함과 긴장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나는 아이를 만날 때 느끼는 긴장을 더 선호할 뿐이다. 솔직함에 주는 긴장, 어느 순간 허를 찌르는 긴장이다.


스밀라가 아이 이사야를 처음 만났을 때 장면을 읽고 빙긋 웃었다. “꺼져.” “난 애들을 잡어 먹어.”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 어른이라면 어렵다. 스밀라는 이사야를 만나자마자 알아버렸다. 이 아이에게 간결하고 투명하게 말해도 된다는 사실을. 스밀라가 맞았다. 이사야가 대답한다. “거짓말 하고 있네.” 스밀라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꺼져라고 애들을 잡아먹는다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그녀는, ‘너와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어’를 “꺼져.”로, ‘좋아한다는 건 호의만을 내포하는 게 아냐’를 “난 애들을 잡아먹어.”로 말했다. 이사야는 안다. ‘당신한테는 그런 마음만 있는 게 아니잖아. 관계를 맺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를 “거짓말하고 있네.”로 말했다.


가끔씩 왜 이렇게 긴 시간 아이들 곁을 맴돌며 일을 하고 있니라는 질문을 한다. 아이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는 옛날옛적에 사라졌다.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도 많다. 가끔 내 속에서 발견되는 힘에 깜짝 놀라곤 한다. 조정, 명령, 자기 충족감, 권위, 자신만만함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는 ‘괴물’이 되기 싶다. 그럼 왜라고 다시 묻는다.

이사야의 저런 말 때문이다. 숲속의 요정과 더러운 물개 새끼의 중간에 있는 아이, 아이가 주는 어떤 진실, 세계를 통과하는 힘, 인식이 빛나는 순간 때문이다.


매일매일이 그렇지만 지난주도 괴로웠다. 어르고 달래고, 길거리에서 싸우는 건 그래도 낫다.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가만히 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야 하는 시간, 아이의 부모와 합의 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 시간, 동료의 감정과 판단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 지지부진하고, 힘들고, 대책 없는 시간 사이에서, 스밀라와 이사야를 경험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좋은데.”

a가 말한다. 나는 a의 그런 말이 좋아서 웃었다. a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웃으라고 한 말 아닌데?”

내가 말했다.

“너무 좋아서 웃는 거야.”

“뭐가 좋아서?”

“너랑 진짜 어울리는 말이잖아.”

a가 뭔가 아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곧 하던 일에 몰두한다.


“깔마가 뭔데 나한테 잔소리하는데?”

“교사니까”

“다른 교사는 안 하잖아. 깔마만 왜 나한테 잔소리 하냐고?”

“다른 교사한테 물어보자. 정말 안했는지. 우리 교사들은 너랑 있는 한 잔소리할 때는 잔소리 해야 해.”

b가 답을 못하더니, 다시 짜증을 낸다.

“그래, 그래. 해 보라고. 무슨 잔소리.”

“제발 니 속에 있는 말 그렇게 독하게 표현하지 말라고. 니 마음이 니 말처럼 독한 건 아니낳아.”

나와 b는 그러고도 한 참을 숙제방 문을 잠그고 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b가 다른 아이들과 회의를 하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깔마가 그러는데 내가 말을 독하게 한데. 내가 좀 그래.”


어른들과 저런 대화가 가능할까. 내가 왜 웃는지 물어보는 아이, 큰 소리 치고 싸우고 난 후 금방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아이. a와 b, 둘과 이야기할 때 나는 내 진심을 말했다. 간결하고, 투명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는 데 이런 대사가 들린다. 너무나 싫은 아버지가 죽음을 맞고 있는 시간을 지내는 아들, 아들이 친구에게 말한다. “그게 말이야. 나도 내 감정을 모르겠네. 슬픈 건지, 속 시원한 건지.”

맞다. 어른은 잘 모른다. 이미 관계와 관계, 세계와 세계가 복잡하고, 얽혀 있고, 성장에 필요한 예의와 형식을 갖추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이 세계의 복잡다단함을 거부하는 어른은, 예의 형식을 거부하는 어른은 스밀라처럼 관계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쁜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아들이 슬픔만을 느낀다면, 후련함만 느낀다면 더 이상하다. 자기 감정을 하나로 정리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어떤 투명함, 어떤 간결함, 어떤 직관이 필요하다.


네가 느끼는 건 슬픔이야, 후련함이야, 후회야, 미안함이야, 증오야 라고 단박에 알려주는 게 아니라, 어떤 시선이다. 투명하고 간결한 직관, 말하지 않아도,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무엇. 그 무엇을 누구는 공감이라 말하고, 사랑이라, 공유라, 환대라 말한다. 드라마속 아들은 친구들의 그냥 그윽한 시선을 받는다.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그런 공감, 사랑, 공유, 환대를 건네주기에, 나는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언젠가는 불가능하겠지만, 혹은 지금도 불가능하겠지만, 그 공감과 사랑과 공유와 환대를 건네준다.

스밀라가 이사야를 만난 첫 시작처럼.


‘그렇지만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은 자신과 나의 공통점을 단번에 갈라낼 수 있는 눈길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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