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동감(同感)의 힘을 빌려

“100% 공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by 열무샘

동료 교사가 다른 교사에게 너무너무 공감한다고 말했다. 나는 심술궂게도 “그래, 나는 꼭 그렇지는 않은데.”라고 해버렸다. 동료 교사가 교사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냐며,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나는 또 심술궂게 질문하고야 말았다. 100% 공감이 가능하냐고. 우리는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공감이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로 말을 주고받았다. 결국 나는 심술궂음의 끝판왕을 달렸는데, 이런 말을 남겼으니 말이다.

“100% 공감할 수 있으면 그건 병이야. 병.”


왜 이리 나는 심술궂은 것일까? 공감의 쓰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나는 너를 공감해.’라는 말은 대화의 물꼬를 틀고 나와 상대방의 거리를 좁히는 매개체가 된다. 흔히 여성은 공감을 잘하기에, 관계지향적이다라는 상식 역시 같은 맥락 이리라.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해 보인다. 공감을 잘한다, 관계지향적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나는 너를 공감해.’라는 말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서, 따뜻한 기운을 선사해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줘서, 그래서 우리가 서로 친해져서, 어떤 비밀이라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등등. 아무래도 나는 무지 차가운 사람인가? 이리 좋은 정서와 이야기에 딴지를 걸고 있지?


고학년 여자 아이들 몇몇은 교사들을 시종일관 긴장시킨다. 자기들끼리 신경전을 벌이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를 공격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친한 관계도 없다. 어느 날은 a와 b가 c를 욕하고, 어느 날은 a와 c가 b를 욕한다. 그러다 a, b, c, d가 e를 잡고, e가 한 편으로 물러나면 a, b, c가 d를 대놓고 배제한다. 욕하고, 잡고 물러나게 하는 사건도 기기묘묘하다. 먼저 아는 척을 안 해서, 나만 빼놓고 웃어서, 이년 전 나를 부끄럽게 해서, 그냥 친한 척해서. ‘감정’이라는 열쇠로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질투, 시기, 편안함, 성가심 등등. ‘심리’라는 열쇠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트라우마, 조정, 소외, 인정 욕구. 방과후 운영이나 교사의 태도로 아이들의 행동을 추적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겠구나 한다.

이 모든 걸 다해도 나는 이 아이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만 봐도 눈을 감고 싶다.


기억해본다. 나는 이 아이들의 나이였을 때 어땠을까 하고. 어떤 장면을 놔두고, 그때 나는 어땠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우르르 찾아와 “네가 이런 말 했다면서.”라고 사납게 물었다. 겁이 났다. 그리고 의아했다. “응.” 아이들이 차례로 사나운 비난의 말을 쏟았다. 겁은 두 배로 늘어나서 막 울었다. 우는 나를 달래는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가 나를 달래줬다. 다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라고. 또 기억나는 순간이 별로 없다. 어린 나는 미묘하고 예민한 감정을 덜 겪는 아이였던 것 같다. 바보 같았나? 영악했던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이랑 노는 걸 많이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관계 특히 또래 여자 아이들과 관계가 복잡하거나 정교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어떤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짧게 걸렸던 것 같다. 울고 이야기하고 끝. 아! 역시 a, b, c, d, e를 공감(共感)하기란, 너무 어렵겠다.


동감(動感)이 필요하다. 저 여자아이들을 공감(共感) 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경우에 놓여 있었던 경험,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야 머릿속 이해를 넘어서는 마음과 몸의 이해까지 가능하지 싶다. 몸이 긴장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저 아이들을 편안하게 마주하려면. 나도 그랬어. 나도 질투하고, 나도 부끄럽고, 나도 외롭고 등등. 뭐지? 나도 질투하고 나도 부끄럽고 나도 외로울 때가 있는데, 왜 힘들지? 강도가 다를 수 있다. a가 겪은 질투와 b의 부끄러움이 c가 처한 외로움의 순간은 내 것 보다 훨씬 더 강할 수도. 나이도 있다. 나는 어른이고, 아이는 사춘기의 입구에 있으니까. 나이뿐 아니다. 성격도, 환경도, 문화도, 지능도 다 다르다. 동감에 기대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건 여전하겠다.


너무너무한 공감을 표시했던 동료 교사는 다른 교사가 처한 상황과 마음을 경험했을 테다. 나는 그 경험이 얇거나 짧다. 역시 감정과 상황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언짢고, 이야기하고 끝이었다. 타 교사에 깊은 공감을 표시한 동료 교사는 그 감정과 상황을 오랫동안 겪었을 테다. 동감(動感)을 넘어서 공감(共感)까지 가능할 정도로.


다시 저 여자 아이 a, b, c, d, e를 떠올린다. 100% 공감 같은 건 누구한테도 불가능하고, 50%의 공감도 어려울 것 같고, 겨우 20%의 공감하는 것부터. 턱없이 모자라지만 동감(動感)부터.


그래,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그래 그때 내가 만약 울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달래주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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