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어떠니
“내가 트라우마가 있나 봐.” a가 말했다. a는 이제 열두 살이다.
아이 입에서 상담가의 언어가 나올 때 반감을 누를 수 없다. “걔가 내 감정을 자극하니까.” “아빠가 억압하잖아.” 상담받는 아이의 언어 능력이 또래 아이보다 낮다고 판단하는 건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나랑 자주 대화하는 아이는 내가 쓰는 단어를 쓰는 걸 발견한다. 그러니 아이가 상담 언어를 쓴다고 해서 언짢아하는 건, 심리 상담에 관한 반감의 한 예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편하다. 자신의 감정, 기분, 느낌, 행동을 트라우마, 자극, 억압이라는 언어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자신과 세계 대부분이 트라우마와 자극과 억압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a는 열두 살이다.
포퍼는 프로이트가 현재를 과거의 산물로 규정했고, 이는 반증 불가능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적이지 않고 사이비 과학이라고 비판했다. 동의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고, 100퍼센트 동의하고 싶다. 비판은 쉽고 가뿐하다. 하지만 현실 판단은 어렵고 무겁다. 100퍼센트 동의하고 싶으나 100%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판단’에서 언제나 서성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프로이트를 윤리적으로 가치적으로 수긍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내가 마주하는 사람은 행복하기를, 행복하기 위해서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a는 아이다.
뇌가소성, 회복탄력성. 뇌는 변하고, 사람은 회복한다. 변하고 회복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인간이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아이의 뇌는 어른의 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고, 회복탄력성 역시 높다고 과학은 증명한다. 왜 아이들과 뭔가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떠올린다. 뇌가소성, 회복탄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는 분명히 현실에서 존재한다. 기억이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드라마 <Anne with an E>을 보면서 계속 a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a는 앤과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이년 전 일을 언급하며 다른 아이를 공격할 때, a는 앤과 다르지만, 뛰고 깔깔거릴 때 보면 앤과 같다. 교사는 아이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 모습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나만 그럴지도) 그래서 그럴까. a와 앤이 다른 순간이 더 떠오른다. 앤도 a처럼 과거를 떠올리며 진저리를 친다. 진저리를 치면서 주눅이 들고, 슬퍼하고, 도망친다. 그럼에도 앤은 빛나는 아이다. a도 앤처럼 반짝 거리고 있는데, 내가 그걸 못 보는 걸까? 보지 못한다면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테다. 내 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통 수준의 교사라고 가정한다면, a가 다른 아이와 비교해서 교사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전하는 게 현실이라고 가정한다면, a와 앤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매튜와 마릴리 같은 좋은 어른의 존재, 상상의 힘, 총명함,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천성.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가 과거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현재만이 거의 유일한 답이다. a의 현재는 과거와 달라야 한다.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느낌, 타인과 원만한 관계가 a에게 필요하다. 답은 명확하나, 이 또한 쉽지 않다는 건 나와 당신 모두가 알고 있다.
문득 물어보고 싶다. a에게. 그때 그 감정이 어땠는지 질문하는 건 상담가의 몫이다. 내 질문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어떠니? a의 답은 어떨까? 지금 역시 과거의 다르지 않다고 말하겠지. 그래도 자꾸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어떠냐고, 질문이 거듭된다면, a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자리에서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현실이 그 때 그 감정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어쩌면 더 좋아졌을 수도, 어쩌면 더 빛 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