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 갈등해결과정에 관한 불편함
1번. 문제는 아이의 감정을 대하는 관점이었다. 부모는 전후 사정과 맥락을 모를 터. 교사가 아이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느냐로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들렸다. 열흘 전쯤이었다. 전해들은 이야기라 할 말이 없었다.
2번. 아직 일주일이 되지 않았다. 아마 나는 아이들의 사생활과 관계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었으리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톡 대화를 읽었다. 온갖 감정이 분출되는 톡이었다. 질투, 비아냥, 갈구, 지배 욕구, 비교, 열등감, 자기 비하, 동류의식, 슬픔, 위축, 잘 보이고 싶음, 연민 등등.
1번과 2번 모두 불쾌했다. 쾌와 불쾌는 감정을 느끼는 토대다. 몸, 심장과 두뇌와 근육, 신경체계가 반응하는 순간이 쾌와 불쾌다. 그다음 감정이 발생한다. 쾌라면 기쁘다, 흐뭇하다, 즐겁다일 테고, 불쾌라면 두렵다, 싫다, 몸서리친다의 느낌일 테다.
불쾌했고, 불쾌 다음의 감정은 달랐다. 1번은 자존심 상함, 번거로움 그리고 창피함이었다. 2번은 외면하고 싶음, 징그러움 그리고 피곤이었다.
어쨌든 방과후에서 일어난 일이니,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 일을 멀찍이 놔둔 채, 자아실현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말 그대로 이해가 안 된다. 저게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가능할 수도 있는 데 내가 모르는 걸까? 알고 싶군. 그러나 도대체 모르겠군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1번과 2번을 넘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왜’하는 심정일뿐이다)
실제로 적용되는 ‘회복적 정의’를 방과후에서 처음 만났다. 학교 폭력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고 있었기에, 세밀한 방법과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회복적 정의를 지지했다. 유감스럽게도 방과후에서 실현되는 회복적 정의는 실망스러웠다. 회복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혹은 회복적 정의 자체가 지닌 문제인지 깊게도 아니고 적당히도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회복적 정의’가 아닌 방과후에서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지니까.
ⓛ 문제가 발생한다. ② 문제의 당사자들이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한다. ③ 개입자는 당사자의 이야기에 각각 공감한다. ④ 당사자의 감정은 해소되고, 문제는 자연발생적으로 해결된다.
대체로 이런 과정으로 느껴졌다. (내가 잘 못 이해했을 수도 있다. 오해를 했다 하더라도, 오해하고 싶어서 오해한 게 아니므로 오해라고 할 수도 없다. 나의 ‘잘 못 이해함’을 발생시킨 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테니)
ⓛ번과 ④사이에서 내가 신뢰하는 지점은 ②이다.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개입자에게 엄정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만들어 준다. 각각 이해 당사자도 비슷하다. 각각은 자기 개인에게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③④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각 과정에서, 복잡하고 다양하고 어려운 어떤 지점이 실종된다는 느낌을 숱하게 받았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하고 치고받았다 치자. 이 문제는 폭력의 범주에서 처리되어야 할 문제인가, 습관인가 아니면 조절할 수 없는 충동의 문제인가, 권력에 의한 폭력인가, 드러나는 현상 배후에 깔린 것은 무엇인가 등등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③④는 말할 것도 없다.
열흘 남짓한 시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사건 1과 사건 2를 맞닥뜨렸을 때, 소위 ‘회복적 정의’ 실현이라는 방과후의 갈등 해결 과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감정에 관해서 공부하고,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사건 1과 사건 2에 관해서 자세히 쓰지 않겠다. 한 문제는 내가 확인하기 힘들 뿐 아니라, 들춰내서 교사들과 같이 의논할 성격이 아니고, 또 한 문제는 앞으로 교사들과 지난하게 토론해야 할 문제이므로, 나의 정리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의 항해> 188페이지. 책은 감정 수행을 ‘관리’가 아닌 ‘항해’라는 단어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 지점도 흥미롭다. 항해는 당연히 은유이며, 관리 역시도 은유라고 칭한다. 감정이 관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전제하기 때문이다.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제 멋대로, 자연발생적으로, 억압 없이 자유롭게 가 아님은 물론이다.)
“항해는 항로의 급격한 변경 가능성은 물론 선택한 항로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수정 가능성도 포함한다. 항해라는 단어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함축하는데, 목표의 변경은 그 변경이 보다 높은 우순 순위 목표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경우에만 합목적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선순위의 최상층은 의도적으로 변경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곳에는 아무런 목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감정의 항해> 중
방과후의 갈등 해결 과정은 겉으로 보기에 ‘감정’을 매우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감이 거듭 강조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갈등 해결의 목표를 ‘해소’, ‘평화’, ‘안정’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은 목표를 둘 수가 없다. 인용한 책처럼 ‘아무런 목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를 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삼십 분, 길어도 세 시간의 과정을 거쳐서, 감정이 존중되고 감정이 해소되는 건 불가능하다.
‘항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면 그 갈등 해결 과정이 중요한 전환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감정을 변경시키고 돌릴 수 있다. 각각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②이 유효한 것도, 항로 변경의 계기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목표가 아닌 전환을 염두에 두고 갈등 해결 과정(물론 단어도 바뀌어야 한다. 갈등 해결이 아닌 갈등 전환 정도로)을 바라본다면, 강조점이나 방법 등이 바뀌어야 한다. 개입자, 즉 교사의 역할이나 성격은 더 많이 변경되어야 한다.
사건 2에 관해서 토론이 가능할까? 현재 시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감정 문제뿐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많은 부분 무의식적 태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토론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합의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역시 이 또한 ‘관리’가 아닌 ‘항해’로 인식되어야 한다. 토론해서 합의하고 합의해서 변경되지 않고, 각각의 교사에게 모멘트를 제공하는 정도. 나는 불쾌한 1번과 2번 사건 포함 모멘트를 거듭거듭 제공받고 있으므로, ‘아! 다행이구나’ 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감정의 항해> 1/3은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