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함을 호소하는 a
내가 a에게 건넨 질문은 “너는 왜 계속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집중하지 않니?”였다.
a의 답은 이랬다. “나는 b와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스트레스를 받는데 말을 못 해, 말을 못 하니까 또 생각이 나서, 다른 행동을 하는 거야.”
a는 이 답을 하기 전에 30분간 울었다.
다른 아이라면, 또는 a의 전 상황을 모른다면, a의 답에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았다. a는 b와 잘 놀았고, 오히려 b에게 함부로 했고, 주의를 받았음에도 다른 사람을 자극하고 방해하는 행동을 했다. 무엇보다 내가 a를 주목한 이후로, a가 어떤 행동에 대한 지문을 했을 때 보여줬던 패턴이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운다, 울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다른 아이에게 부정적 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호소한다.
a의 답을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없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질문한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추궁이나 취조가 될 가능성도 많았다. (그때 내 마음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으니) 다만 전부터 궁금했던 싶었던 걸 질문했다. c가 a 쪽으로 검정 색연필을 던졌을 때, a의 반응에 대해서였다. a는 b에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는데, 정작 a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쪽은 b를 포함한 센 친구들이다.
“너 왜 그 아이들이 뭐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어? 전에 깔마가 너한테 이유 없는 공격하는 아이한테 뭐라고 했다가 화를 냈잖아.”
a의 대답은 이랬다. “일이 커질까 봐.”
방과후 또래 여자 아이들이 보였던 어떤 감정 패턴과 표현 방식은 정말 불쾌했다.(거의 과거형이라 다행이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강자와 약자, 사람의 구별해서 감정을 다르게 드러냈다. 무엇보다 그 감정은 혐오, 모욕감 유발, 비교, 지나친 질투 등등. a가 말한 “일이 커질까 봐.”도 내게는 그런 맥락으로 읽혔다. 약한 b한테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
방과후 갈등 해결 과정에 회의를 느꼈던 것도, 아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야, 왜 그랬어라고 질문했을 때, 아이들의 답은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훌쩍 넘어 버리곤 했다. 내 눈(나라는 사람의 특성, 교사의 역할에 관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교사가 아닌, 철저하게 나라는 교사의 눈)에는 격렬한 험담으로 보였다. 나쁜 소문을 전하는 험담 수준을 또 뛰어넘곤 했다. 울고, 짜증내고, 신경질과 투정을 일삼고 또 우는 아이들을 참기 힘들었다.
울고 울고 또 우는, 자신의 말 못함을 호소하는 a와 대화도 비슷했다. 왜 a는 어떤 갈등, 어떤 문제에서도 울고 울고 또 울면서, 말 못 하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것일까?
‘1학년 때부터 그랬어’, ‘전에도 그랬어’, ‘2학년 때 걔가’도 이 아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한 아이가 아니라, 여러 아이가 빈번하게 자주 과거의 경험을 말한다면, 보통 어른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트라우마가 극복이 되지 않았나, 아이들의 과거 경험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나 등등. 한 때는 진짜 그런 걸까 싶어서, 아이들의 이전에 대해서 동료 교사에게 질문하고 생각하곤 했다. 결론은 꼭 그렇지도 않다였다. 아이들의 개별적 특성이 있고, 개별 특성이 강한 여자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방과후의 이전 상황이 좁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특별히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문제는 아이들의 감정, 아이들의 상황을 대하는 우리 교사들의 어떤 패턴이 아닐까?
<감정의 항해> 중반부에는 코드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문화, 정치, 사회제도 안에서만 ‘코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영역에서도 ‘코드’가 있다. 18세기 영국의 명예 코드가 신혼부부의 파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기술하면서, 명예 코드는 개인의 의식에 작용을 했을 뿐 아니라 감정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하고 있다.
패턴을 코드로 변경해서 생각해 본다.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과후 교육의 감정 코드는 무엇일까? 몇몇 단어가 떠오른다. 지금은 쓰지 않겠다.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a와 경험에서 살짝 읽히는 코드는 ‘표현’ ‘드러냄’ ‘억압받지 않음’ 등이 아닐까 싶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 전적인 확신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억압받은 이에게 말과 글을 돌려주는 일이 내 일 중 하나라고 믿었던 적도 있다. 방과후, 방과후 이 아이들, 이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의 관점을 경험하면서, 어떤 믿음도 단순하지 않다는 걸 또 경험하고 있다. 사람과 관계가 복잡한데, 표현과 드러냄과 억압받지 않음도 간단할 수가 없다.
나는 우는 a에게 냉정하게 굴었고, a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언급한 대화도 울음을 멈춘 후 대화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a에게 처음의 질문을 다시 했다. “너는 왜 작가 동아리에서 집중하지 않는 거야? 다른 사람을 방해하고.” 그제야 a는 자신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 겪고 있는 어려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욕심에 대해서 말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야 하는 걸까? 참 지난하군. 아이를 만나는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