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아이가 어떻게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또는 어떻게 감정적이었는지
“그녀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또는 어떻게 미치게 되었는지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여성 작가에게는” - <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207쪽
저 문장의 몇몇 단어를 바꾸면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여자 아이가 어떻게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지 또는 어떻게 감정적이었는지에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교사에게는.”
여자 아이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예외적인 몇몇 아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여자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우리 교사들의 인식과 발화의 중심에는 ‘관계’와 ‘감정’이 놓여 있었다. 관계 폭력, 관계 중심, 관계 존중, 소외, 질투, 비교, 열등감, 슬픔, 시기, 화. 지루하고 피곤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지루하고 피곤했으니까. 하지만 교사인 내가 언제까지 먼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법.
a와 수다를 떨면서 재미있었다. a는 관계를 신경 썼지만, 관계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아이는 유쾌했다. “친구가 없으면 심심하잖아.”라는 말도 마음에 들었다. a는 심심하지 않기 위해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친구가 없어도 심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 말에, a는 “그럼 깔마가 나 심심할 때 놀아줄 거야?”라고 물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너랑 놀아주는 게 교사의 일은 아니거든.”이라는 말에 a는 짜증을 냈다. 짜증은 솔직했고, 솔직해서 나는 더 유쾌해졌다.
a는 여자 아이들 중 가장 강했다. 잘하는 것도 많았고, 잘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잘하지 못하는 것 중에는 공부도 있었다. a는 5학년이 되면서 공부에 욕심을 냈고, 욕심 역시도 솔직히 표현했다.
어느새 나는 a를 바라볼 때, ‘관계’와 ‘감정’을 사용하지 않았다.
질투, 견줌, 시기, 열등감과 우월감. b를 언급할 때 따라다녔던 단어를 떠올린다. 내가 b를 멀찍이 봤을 때, 사용했던 단어들이다. 실제로 b를 가까이하면서 내가 경험한 단어는 분노 표출이었다. 부드러웠다, 금방 공격적이었다가 다시 부드러워지는 b. b가 불편했던 이유는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태도의 돌변이었다. 아이와 내가 거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b는 질투와 견줌과 시기와 열등감, 우월감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b 역시 너무 투명하고 너무 솔직해서 힘든 아이였다.
a와 b는 여느 남자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힘을 가지고 짜증을 내는 건 졸업생 c와 비슷했고, 친절과 화를 번갈아 사용하는 모습은 저학년 남자아이들 대부분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많은 시간 a와 b를 ‘관계’와 ‘감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까?
c와 d, 그리고 많은 여자 아이들. 나는 아직도 그 아이들과 ‘관계’ ‘감정’을 연관시킨다. 지나치게 관계에 연연한, 감정 표현을 무기로 사용하는 등등. 머릿속에 고정된 관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연약함, 낮은 자존감, 욕망의 실현과 생존을 위해서 터득한 방법, 세계의 무의식적 요구 등등이 현재의 아이를 설명한다고 짐작하는 태도 말이다. 어쩌면 c와 d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를 수 있다. e의 경우도 그랬다. 주위 어른들이 부여한 서사를 자기 것으로 만든 e는 ‘자기= 피해자’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 e는 처음부터 관계와 감정에 기대는 아이가 아니었다. 가정과 방과후에서 ‘자기= 피해자’라는 공식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오랫동안 여자 아이들을 관계와 감정에 경도되어서 바라보았는가에 관한 답은 역시 성인지 감수성의 문제였다. 그 아이들과 상관없이 지내고 싶다는 욕구 역시도 ‘여자 아이들은 이럴 것이다.’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물론 내 쪽의 문제만 있는 건 아니다. 여러 문제와 상황이 중첩되어 있지만, 외부 문제와 상황을 언급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만 신경 쓰는 게 효율적이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은 1971년에 쓰여졌다. 글의 제목은 <여주인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여자는 왜 글을 쓸 수 없는가?>이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를 예를 들면서 러브스토리의 서사만 부여받는 여성, 러브스토리의 서사를 거부한 여성에게 남은 것은 서정성과 무질서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서정성은 눈물, 슬픔, 우울, 낭만 등의 서정성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서사의 반대편에 있는 서정, 영웅 서사 없는 플롯으로서 서정을 뜻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썼던 세상은 그랬다. 여성은 성공과 모험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고, 오직 러브 스토리 안에서만 아늑하게 존재했다. 1971년 다르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비(영웅) 서사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글은 가부장적 비평 질서 속에서 소설이 소설 같지 않다, 지나치게 개인적이다, 산만하다 등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자살했다. 1971년이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가인 조애나 러스는 여성 서사의 대안으로 탐정소설, 초자연적 소설, SF를 제안한다. 2020년 나는 여성 탐정과 X파일, 르귄과 정세랑의 이야기에 환호한다. 자살과 환호 사이, 100여 년의 시간이 놓여 있다.
세상과 나 중 어느 쪽이 더 큰 힘이 세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세상을 선택한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나는 흘러가고 바뀌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 역시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애나 러스, 그리고 2020년의 세계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과제를 던져 놓았고, 이제는 구체적인 내가 바뀌어야 한다.
여자 아이들을 ‘관계’와 ‘감정’의 단어에 가두지 않는 게 현재의 과제다.
“진정한 여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남자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인구 폭발과 처음의 두 재앙(전 글에서 생태적 위기와 전쟁을 언급함)이 영속화됨을 의미한다. 젠더적 역할은 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 젠더 역할에 복무하는 신화 역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 <같은 책> 220쪽
진정한 여자와 어머니라는 단어에 오래 머무른다.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낡은 신화를 이용하는 한 여자는 쓸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신화라면 어떨까?” - <같은 책> 220쪽
마지막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