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교과서 같은 a
a는 아이들에게 도덕 교과서 같은 캐릭터다.
“생명을 함부로 잡으면 안 돼.”
“혼나는 게 아니라, 잘 못 된 건 알아야지.”
“방과후에서 뛰면 안 돼.”
a가 b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 자신은 하지 못하는 나쁜 일을 하라고 시켰을 때, 제일 먼저 스쳤던 생각은 ‘역시’였다.
아이들이 규칙을 특히 윤리가 반영된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기란 힘들다. 방과후에서는 특히 그렇다. 방과후 아이들의 관계는 밀접한 만큼 적나라하다. 규칙을 적당히 지키고, 좋은 어린이인 척하기가 쉽지 않다. 교사들은 짐작하고 있었고, 어쩌면 아이들도 알고 있을 테다. a가 자기들에게 잔소리를 퍼붓지만, a 역시도 나쁜 행동을 하리라는 걸.
곤혹스럽다. 방과후 문화에 필요한 건, 지금은 경계와 절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a와 같은 아이(a뿐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a와 비슷한 아이들은 또 있다.)는 고민과 머뭇거림과 혼란을 선사한다. 자신을 주체 못 하는 아이에게 나는 정리와 멈춤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두려움과 초초함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를 표시한다. 불편하고 지루하지만 과정은 말 그대로 과정이기에, 나나 아이들이나 전환을 경험하고 관계는 두터워진다. 소리 지르고 겁박(나는 제안이지만 아이들은 겁박으로 느껴지리라)하고 타협하면서, c와 나는 ‘싫어’와 ‘안돼’로 우리만의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문제는 a가 나와 c, 나와 또 많은 c들의 과정에서 교사를 권력자로 인식하는 데 있다. a는 자신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인지,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나쁜 행동을 하는지 교사에게 자주 종종 말한다.
‘참내, 내가 뭐라고. 그래 봤자 부모와 학교 담임교사보다 만만한 교사인데.’ 하면서도 a가 이해되면서, 내 탓이라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만약, 말 그대로 만약이지만. a에게 무조건적인 허용을 보여준다면 a는 어떻게 변할까?
200년 전 금욕주의가 아닌 새로운 정신의 자각을 주장하던 글이다. “인간의 행복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의 독립성과 함께 커진다. 그 대상이 전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이어야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가 그를 선택했다고, 자유로운 존재가 그의 욕망에 복종한다고,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정신의 자각, 가슴이 느끼는 뉘앙스는 그 새로운 영혼들의 이념 및 인상들과 함께 몇 배로 증폭된다. 너무나 오랫동안 시들어가던 영혼이 새로운 도덕적 삶을 시험하는 것이다.”
윗 문장을 방과후 관계와 문화로 옮겨본다.
‘아이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아이의 욕망을 받아주자. 아이는 자유롭고 활기차게 자랄 것이다.’
오랫동안 암묵적으로(어쩌면 표방되었을지도 모른다. 방과후 경험이 가장 짧은 교사인 나는 암묵적이었는지, 표방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자리 잡은 방과후의 신념과 거의 비슷하다. ‘눈 딱 감고 아이들의 욕망을 받아 줘’라는 심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도 알고 현실도 안다. 새로운 정신의 자각이라는 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정의 항해> 2부는 1700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혁명 150년 동안 감상주의, 감정에 대한 열광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어떤 파국으로 치닫는지 기술하고 있다. 감정표현과 친밀성에 대한 열광, 감정적 성격과 감정을 선한 힘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억압적 봉건 이념을 극복하는 무기였다. 무기는 이타주의와 박애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공포 정치의 도래였다. 감정이 결코 아름답지만 않다는 걸 떠올려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명의 a를 어떤 관점과 태도로 만나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방과후만으로 a가 변하지도 않을 테고, 아마 또 지루하고 긴 과정을 견뎌야 하리라.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게 방과후다. 피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욕망이요, 거부감이 솔직한 감정이다. 내 욕망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역시 a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