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곳의 두통

무엇보다 감정으로 가득 찬 글을 쓰며

by 열무샘

거의 서른여섯 시간 동안 편두통 상태다. 누적된 피로일 수도, 장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후유증일 수도, 저기압일 수도, 또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 찾아든 온갖 감정과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정수리부터 목까지, 머리 오른쪽의 세로축을 빼내서 어디로 던져버리고 싶다는 느낌으로 아침을 맞았다. 두통과 함께 식탁에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달랐다. 우거진 초록이 주위를 넘어 집 안에 앉아 있는 나를 압도했다. 나는 이제까지 식탁 의자에서 밖을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컴퓨터 앞, 환기를 위해 문을 여는 자리, 혹은 현관문에서 밖을 바라보았지, 이 구체적이고 특별한 자리에서는 처음이었던 셈이다.

혹은 시간 때문일 수도 있다. 겨울도 가을도 봄도 아닌 여름 장마 한가운데 초록 나무 군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 어제와 그제와 내일의 나무는 오늘 아침 그 시간의 나무와 다르니까.

3미터 남짓 창문 너머 풍경도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시간에 보는지에 따라 다른데, 왜 한 사람의 죽음과 한 사람의 범죄(나는 성추행은 범죄라고 확신한다)에 관해서는 단일한 입장과 단일한 행동을 요구하는 건가? 정의당 대표 심상정은 애도를 표시하고, 조문을 간다. 정의당 의원은 성추행 피해자와 연대를 표시하며, 조문을 가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왜 문제인가? 단일한 입장, 신속한 입장 표명에 관해서 이리 언짢은 이유는, 바로 내 머릿속에 이 두 가지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심상정도, 정의당 의원도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두 가지를 담아두면 되니까. 그들은 두 가지 하나를 선택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 얼마나 괴로울까?

한국 사회의 이분법, 어는 편인지 대답하는 지긋지긋하다 못해, 이런 진영논리야말로 가장 심각한 악이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그제와 어제와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

다행이다. ‘종종’이었다가 ‘가끔’으로 변화하는 중이라. 일터에서도 역시 이분법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도 천만다행.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마주치는 일이 적어져서, 내가 위치한 자리가 어느 편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고 쓰고 보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분법이라고 하면 투병하게, 드러나는 진술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어떤 입장, 어떤 주장, 어떤 태도. 이 곳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입장이다.’ ‘나는 이 것을 지지한다.’는 명백한 진술을 몇 번이나 만났지?

박 시장과 관련한 회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은 “그는 순수한 사람이었다.”였다. 평소 호감을 가졌던 역사학자의 글이라 입 안이 쓰다. 순수한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었기에 성추행을 할 리 없고, 성추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순진해서 뭘 모르고 했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성추행이 범죄라는 사실이 이 사회에 도착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 아닌가? 그는 뭘 모르고, 순진해서, 순수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런 태도와 진술은 불편하다. ‘순수하게’ 일 하자, ‘선하게’ 바라보자, ‘평화롭게’ 마무리하자 등등. 노동의 대가가 아닌 아이와 마을과 사회를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하시고, 문제가 있어도 뾰족하게 굴지 말고 문제의 원인을 ‘선하게’ 바라보고, 문제 해결보다 관계의 안정을 위해서 문제를 대충 ‘평화롭게’ 덮고 가자.(나는 이런 평화롭고 선하고 순수함 앞에서 주로 “나 졌다.”로 대응하는 편이다. 왜 싸우지 않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평화, 순수, 선함을 이길 무기가 없다. 내게는. 백전백패다.) 그리고 배후에는 다른 소문이 떠돌아다닌다. 너는 누구 편이니? 그와 그녀는 저 편이야. 우리 편에 올래.

애초에 ‘순수’라는 건 없다. 갓 태어난 아기의 몸도 다양한 세포와 물질과, 외부에서 진입한 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은? 다이아몬드는? 살아 있는 물질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은 단일한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다른 원소, 전자, 심지어 볼 수 없는 파장의 복합체일 뿐이다.

선하고 평화롭고 순수함을 주장하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분법적 태도를 가장하는 위선자이거나,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다시 박 시장으로 돌아간다. “그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는 진술은 폭력이다. 폭력의 대상은 박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성추행과 성폭력으로 고통받은 모든 피해자들, 폭력과 악에 희생된 이들이다. 순수라 단어는 모든 피해자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당신이 착각했어요” “당신이 용서하세요.”

그리고 저 순수함은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 포함 숱한 이들에게 어떤 입장을 강요한다. 한쪽 입장이다. 정의당 대표는 조문을 갔으니, 순수한 사람의 죽음 앞에 마땅한 예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정의당 두 의원은 조문을 거부했으니, 순수한 사람의 죽음 앞에 당연한 예의를 위반했다, 그러니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고.

나는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황망하며, 슬프다. 그를 존경하거나, 그를 지지하거나, 그가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믿기 때문은 아니다. 성추행, 추문, 윤리의식, 정치적 올바름, 한국 사회의 후진성, 명성과 명예, 고독, 우울과 절망. 숱한 단어가 그의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이다. 애도를 표시하는 나를 비난한다면, 비난에 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또 나는 그 비난 앞에서 질 것 같다. 당신은 누구 편이야, 성추행을 인정하자는 거냐? 당신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지요 등의 공격을 이길 무기가 없다. 역시 백전백패다.


왜 편두통이 찾아왔냐고 물어본다면, 답은 여러 가지다. 편두통의 원인은 너무 다양해서 찾을 수가 없다. 내게 편두통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증상이다. 그의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무엇이 편두통을 유발하도록 중요하냐고 질문한다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말할 필요 없는, 말할 수 없는,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의 저편에, 여러 가지가 있다. 편두통은 이 것들 때문에 찾아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몸속 수분이 모자라서, 당분의 과다 섭취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박 시장의 죽음은 편두통을 일으킬 만큼 복잡한 사건이다.


역시 다르다. 지금 이 시간 책상 옆, 창문 너머로 보이는 초록색은 옅은 하늘색 사이에서 한 없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다. 이 시시각각의 다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살아 있다는 건, 바로 이 복잡하고 다양하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화하며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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