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의 쓰레기 버리기
우리 집에 어떤 매니큐어가 있는지 이야기가 오갔다. a네 집은 매니큐어가 충분했다. 충분한 매니큐어만큼 a는 그냥 이런 게 있다고 말했다. b네 집에는 매니큐어가 많았다. 많은 만큼 b는 매니큐어를 자랑하고 싶었다. b는 결국 집에 가서 매니큐어 몇 개를 가져왔다. c는 자기 집에 매니큐어가 얼마나 있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c는 자기가 가진 검은색과 흰색 매니큐어를 파우치에 거 꺼내고 내 손톱에 흰색과 검은색을 칠한다. c는 아무 말이 없다.
영어 공부가 얼마나 하기 싫은지 이야기는 어느새 파닉스와 문장과 회화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a는 영어를 못하지 않는다. 파닉스를 이용해 어떻게 단어를 외우는지, 회화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a는 못하지 않기에 특별한 욕심이 없다. b는 영어를 잘하고 싶다. 하지만 b의 영어 실력은 a만큼 좋지 않다. 파닉스를 억지로 끼워 맞춰 단어를 외우려고 한다. b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그리고 c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a와 b는 학원을 다니고, c는 학원을 다니지 못한다.
a와 b와 c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나는 두 손을 아이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오른손, 왼손 각기 다른 매니큐어가 칠해진다. 왼손의 처음은 b였다. b는 못 칠하겠다며 a에게 매니큐어를 건넨다. a는 눙슥한 솜씨로 빨리 매끈하게 매니큐어를 칠한다. a가 b의 솜씨를 칭찬하느라 바쁘다. a는 담담하다.
오른손은 c의 담당이다. c는 아무 말하지 않고, 내 손가락에 검은색과 흰색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몇 번 흔들렸다. 내가 말을 하느라, 다른 아이가 나를 치고 가느라 손이 흔들렸다.
c가 화를 냈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와 “그렇게 치고 가면 어떻게?”
화를 많이 냈다.
두 손을 아이들에게 맡긴 건 임시방편이었다. a, b, c가 함께 있는 걸 지켜보는 게 아슬했다. a가 먼저 6학년 언니한테 화가 났다고 말하고, b는 계속 기분이 나빴다 좋았다 한다. 감정의 진폭이 너무 크다. a, b와 화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c는 두 아이의 기분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장난을 치다 c에게 맞고 눈물을 흘렸는데도 괜찮다고 한다. 세 아이의 팽팽한 감정과 그 사이 긴장은 엉뚱한 곳으로 튄다. 나한테 짜증 내는 건, 적당히 야단치고 적당히 넘어가면 되니 문제도 아니다. 동생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빽 지르고, 괴상하고 엽기적인 행동을 한다. 짜증과 화와 엽기를 진정시키느라, 내가 쓴 방법은 매니큐어였다.
매니큐어를 바르는 잠시는 평화로웠다. 평화가 오래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 아이들은 집에 매니큐어가 얼마 있는지, 영어가 얼마나 재미없는지 이야기로 시작해서 또다시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a는 비교적 편안했지만, b는 흥분했고, c는 화가 났다. 원래부터 그랬다. a는 힘이 있고 자존감이 높다. b는 힘이 있고 자존감이 낮다. c는 힘도 없고 자존감도 낮다.
세 아이와 주변에 모인 여자 아이들 중앙에서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감정의 항해>에서 레디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이모티브’를 제안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다.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 놓이면 목표가 정해지고 그에 따라 생각 재료가 활성화되는데, 그것들 중에서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한다.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활성화된 생각 재료, 바로 그것이 감정이다. 레디는 감정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해명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러한 감정이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질문한다. 그는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은 '이모티브(imotive)'라고 칭한다.”
침울하고 아무 말 없고 손가락이 흔들린다며 화를 내 c를 떠올려 본다.
1. c의 상황 : a, b의 매니큐어 보유 여부에 대한 말을 듣고, 자신의 집에는 그만큼의 매니큐어가 없다는 걸 알아채린다.인다. 그리고 영어 학원에 다니지 못하고, 영어를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2. c의 목표 : 불쾌감을 느낀다. c는 어떻게 하든 이 불쾌감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3. c의 생각 재료 : 속상함, 열등감, 슬픔,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 할 말이 없는 무기력, 얄미움, 언짢음, 비교당함 그러므로 아무 말을 하지 않기로 함.
4. c의 의식에 입장한 생각 : 매니큐어와 영어에 관해서는 무언가를 말하면 바로 비교당하니까, 아무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5. c의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생각 재료 : 속상함과 열등감과 등등
6. c의 감정이 공동체 구성원 여기서 a, b와 관련된 방식(그동안 맥락에서) : a에게 착하고 힘이 없는 자신을 보호받는다. a가 싫어하는 b를 자신도 미워한다.
7. 그 당시 다른 동생과 나와 관련된 방식(그동안 맥락에서) : 깐 마늘 내가 지나치게 화를 내면 혼을 낸다. 그러니 적당하게. 동생들한테 화를 낸다. 깔마가 뭐라고 하면 왜 동생들만 이뻐하냐고 화를 낸다.
8. 그리고 또래 관계에서 a : 돈이 없고, 순하고, 착한 아이. 부모님과도 비슷하게 관계를 맺음.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정리해보니 뭔가 새로운 게 보일 듯 말 듯하다. c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혹은 괴상하고 엽기적인 행동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의지에 입장하지 못했던 저 많은 생각 재료를 인지하고 있을까? 그동안 나는 c가 인지할 것이라는 전제로 c를 대했다.
아무래도 내 큰 착각이었던 것 같다. <감정의 항해>는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생각 재료, 즉 감정이 각각 공동체에서 규범과 문화, 정치적인 맥락에서 다르게 번역 해석될 뿐 아니라, 은폐되고 억압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c는 가정에서 착한 딸로 살고 있다. 착한 딸이 저 많은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안될 일이다. a, b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일터. 무엇보다 c는 어린 아이다.
그럼 c가 방과 후와 교사들에게 보이는 저 분노는? c가 화를 퍼붓고, 짜증을 내고, 괴상한 행동을 일삼는 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의식 영역에 속하지 못한 감정의 양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그냥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다. 속상함, 열등감, 슬픔, 죄책감, 무기력 등의 감정을 인지하지 않고 그냥 폭발한다. 분리수거는커녕 쓰레기통이 찌그러지고, 쓰레기통에 오물이 묻을 정도로 막 버릴 뿐이다.
뭘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이 생각 저 생각이 왔다 갔다 하지만 멈춘다.
그냥 오늘은 양손에 어지럽게 장식된 매니큐어나 지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