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에게
a는 통통하고 작은 아이다. 배는 볼록 나왔고, 다리는 짧다. a는 두꺼운 안경을 꼈다. a는 느리다. 달리기는 마지막 순위고, 잘 넘어진다. 날래고 분주한 방과후 안에서 a는 힘들 수밖에 없다.
놀이터 담벼락에 a와 내가 앉아 있었다. a가 내 앙상한 손 위로 드러난 시퍼런 핏줄을 보더니 왜 그래라고 질문했다. 우리는 늙음에 대해서, 피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a가 자신은 뚱뚱한 게 너무 싫다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 보고 뚱뚱하다고 할 때 속상하다고 말했다. 내가 뭔가를 말하고, a가 또 뭔가를 말할 쯤이었다.
“깔마”라는 크고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 둘이다. 나는 이 학년 아이들을 많이 좋아한다. 편애의 절정이라고나 할까, 이 아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고나 할까?
두 아이가 나와 a에게 관심을 가진다. “a가 뚱뚱하다고 놀리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난데.”라고 했더니 둘이서 법석을 뜬다.
“누구야? 누가 그랬어?”
“만약 그 아이가 누구든 ** **라고 해.”
정말 실감 나게 욕을 했다. 나는 교사인지라, “야 그만해라.”라고 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었다.
“형아가 혼내줄까?”
“아니다. 어떻게 반격할지 알려줄게.”
법석 법석을 떨더니 킥 연습을 시킨다면서, 철봉에 킥을 날린다. 두 형은 킥을 잘 날린다. 방과후에서 갈고닦은 실력이니 오죽했을까? a가 킥킥, 깔깔, 온갖 웃음소리를 내며, 철봉에 킥을 날린다. a는 계속 헛발질이다. 두 형들은 a가 헛발질한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두 형들의 현재 시점 목적은 a에게 킥을 알려주는 게 아니니까, 두 형들은 a와 함께 웃고 떠들고 싶었으니까.
요즘 a는 시무룩하고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움직이지도 않고, 잘 드러눕고, 게임 이야기만 하고 싶어 했고, 짜증과 화를 냈다. 나는 a에게 높은 소리로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배에 힘을 주고 화를 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a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신기하다. 아니 신기한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형들과 실컷 떠들고 웃던 a는 형들이 가고 나서도 기분이 좋았다. 신발 던지기 시합을 하고, 그렇게 힘들어하던 얼음 땡 놀이도 했다. 신발 던지기는 전보다 잘하고, 얼음 땡은 여전히 못했다. 하지만 형들과 웃던 a는 요즘의 a와 달랐다.
“감정은 여타의 인지 습관처럼 단기적으로는 비의지적(자동적)이지만, 보다 긴 시간 틀에서는 여타의 인지처럼 학습되고 해소된다. 감정의 학습에는 깊은 목표 관련성과 심리 통제가 개입된다.” - <감정의 항해> 60P
감정과 사고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명제는 감정 이론에서는 이미 정론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대부분은 감정과 사고를 분리하는 데 익숙하다. 나 역시 그러한 편. 감정은 그대로 두고, 조정되지 않는 신비스러운 영역, 약자는 감정 표현을 해야지 하는 어떤 정치적 올바름 등등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만날 때도 ‘사고와 분리된 감정’이라는 인식 틀을 사용할 때가 많다. ‘감정 표현을 배워야 해’라고 했다가도 ‘억눌린 감정을 표시해야지’를 왔다 갔다 한다.
“유아 훈련에서 어린이가 충동을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 어른이 어린이에게 수치심을 불어넣는다. 어린이가 식사 중에 음식을 바닥에 던지거나, 코를 옷소매로 닦거나, 손님들 앞에서 화를 내면, 거듭해서 야단을 맞고 충동을 억제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훈련이 지속되면, 예의나 예절의 위반에 대단히 자동적이고 즉흥적으로 수치심과 당혹감이 동반된다.”
- 같은 책 같은 P
이 지점이다. 어른인 나 혹은 우리는 아이가 수치심과 당혹감을 느끼는 걸 두려워한다. 이런 과정이 아이를 억압할 수도 있고, 아이의 자존감을 낮출 수 있다는 불안을 지니고 있다. a에게 소리를 높이지 말고 배에 힘을 주라는 요구를 했을 때, 나는 이런 내 말이 잔소리에 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배에 힘을 주지 못하는 a가 현실에서 실패를 거듭한다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a는 내가 말을 하고 난 후, 한 두 번은 배에 힘을 주고 화를 낸다. 소리를 지르다가도 “배에 힘”이라는 나의 주의에, 잠시 멈춘다.
“학습에는 그러나 심리 통제가 작동한다. 코를 풀거나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코를 풀거나 소리를 지르려는 충동을 찾아야 한다.” - 같은 책 같은 P
다행이다. 감정 이론은 즉흥적인 수치심과 당혹감에서 멈추지 않는다. 감정 역시 학습이 필요하며, 그 학습에는 심리 통제가 작동하고 작동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가 a에게 요구하는 “배에 힘.”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감정 이론을 빌리는 건 자기 합리화일까? 자기 합리화를 하기 전에 두 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배에 힘”에도 불구하고, a는 힘들었으니까.
두 형들이 a의 감정을 다시 바꿔놓았다. 욕하는 거야, 발차기하는 거야라는 형들의 유머와 떠들썩함. 나는 두 형과 a가 무조건 폭력을 신봉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날 내가 목격한 장면도 폭력을 학습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두 형과 a가 노는 자리였다. a는 욕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발차기도 번번이 어긋났지만, 그 잠시의 시간 동안 속상한, 열등감, 창피함, 울적함, 우울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편안하고 자유로웠고 무엇보다 신이 났다.
이 날 형들은 감정의 조절이라는 의지적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발산이라는 비의지적 영역에서 a의 부정적 감정을 보살펴 주었다.
감정, 사고, 다시 감정. a와 보낸 삼십 분 정도, 이 변화와 관계를 집약적으로 경험했다.
부제목을 a에게로 달았다. 이 글이 a에게 전하고 싶은 사고며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