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엄마는 미스터 트롯을 좋아하는 걸까?

- 미스터 트롯의 남자 가수들

by 열무샘

우리 엄마는 세련된 사람이라 트롯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남진, 나훈아는 물론이고 태진아, 송대관이라면 질색하셨다. 이미자나 주현미 쪽도 마찬가지. 장윤정과 홍진영은 좋아하셨는데, 그것도 트롯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했다. 밝고 야무지고 할 말 하는 똑 부러진 여자를 좋아하니까.

삼 주 전인가, 전화로 요즘 미스터 트롯을 본다고 하시길래, 내 첫 반응은 “왜?”였다. 엄마는 머쓱하신지, “좋아서.”와 “요즘 다른 건 볼 게 없다.”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좋아서보다는 요즘 다른 건 볼 게 없다는 답에 호응을 했다. 그러게 요즘 그렇지 하면서, 엄마도 나처럼 인터넷에 익숙하면 보고 싶은 방송 몰아서 볼 수 있는데라고.

사실은 달랐다. 엄마는 ‘좋아서’ 미스터 트롯을 보고 또 보셨다. 사랑의 콜센터나 뽕숭아 학당 같은 유사물이 아니라, 정확히 미스터 트롯을 좋아하셨다. 휴가 내내 나는 미스터 트롯을 방영하는 채널을 찾아, 사전 예약을 하고 엄마와 함께 미스터 트롯을 시청했다.

엄마의 음악 취향이 극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엄마는 전통 트롯의 창법을 답답하게 느끼셨고, 성악과 락발라드가 섞인 트롯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14살 소년의 미성에 눈물을 흘리셨다. 트롯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미스터 트롯을 보고 또 보는 엄마.


엄마 옆의 나도 미스터 트롯을 보고 또 보았다. 덕분에 트롯이 왜 대단한 음악 장르인지 알게 되었다. 52살 여름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기껏 5분이 넘는 짧은 시간 동안 웃고 우느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혼미하다는 표현이 진부하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혼미해졌다는 단어는 이럴 때 써야 한다.) 가사는 유치했고, 몸짓은 숨김이 없고, 리듬과 음정은 단순한 이 노래가 뭐라고. 이제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필요할 때면 미스터 트롯의 기부금 미션 공연을 볼 예정이다. (미스터 트롯 7회, 8회. 다섯 공연 모두 괜찮은데, 특히 정동원의 희망가와 ‘젊은 그대 잠 깨워나라’가 등장하는 패밀리가 떴다 공연은 음악이 감정을 울리는 게 뭔지 적나라하게, 직진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조금은 알게 되었다. 엄마가 왜 트롯을 싫어했고, 미스터 트롯을 좋아하는지. 갑자기 엄마와 윗세대 여성들과 내 주위의 많은 여자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미스터 트롯의 그들, 트롯 가수의 도전과 성공, 경쟁과 연대의 스토리 안에 존재하는 남자 가수들은 권력을 지닌 폭력적인 남성이 아니었다. 잘생겼으나 부드럽고, 섹시하나 공격적이지 않고, 힘이 있으나 겸손했고,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했지만 여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가수들뿐 아니었다. 심사 위원으로 등장하는 늙은 남성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꼰대로, 벌컥벌컥 화를 내거나, 부인의 열광에 질투를 하는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호감을 받는 남성 심사위원은 젊고 상냥하고 귀여웠다. 사회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어느 여성 관객과 다르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슬픔을 감추지 않았다.

그 남성들은 모두 안전했다.


미스터 트롯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흥미로웠다. 초반 젊은 남성에 열광하는 여자 심사위원의 모습은 중반 들어 사라졌다. 남성의 근육질 몸에 열광하지 않았던 장윤정은 미스터 트롯의 권위를 대표했고, 그녀는 엄정함과 따뜻함을 적절하게 보여주었다. 남성 복근에 함성을 지르던 노사연이 장윤정에게 “넌 여자 아니니?”라던 질문이 생각난다. 장윤정은 애매하게 대답을 했고, 그 애매한 답과 상황은, 보는 이에게 장윤정을 여자 아닌 심사위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재미있지만 씁쓸하고, 씁쓸하지만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중년 여성에 관한 혐오를 이렇게 영리하게(어쩌면 의도가 아니라, 무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 혐오는 작정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니까) 드러내다니, 보는 나도 노사연한테 짜증을 냈으니 말이다. 트롯 팬덤에 20대, 30대가 새롭게 등장했다지만 트롯의 주 대상자는 중년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젊은 남성을 사랑하는 주책의 중년 여성 캐릭터를 없앤 제작진은 영리함을 넘어 현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제작진의 현명함은 미스터 트롯 안의 어머니 키워드에도 드러난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이야기가 존재했지만 과하지 않았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과 비교해 볼 때 보통 혹은 그 이하였다.

심사위원은 여성이 아니라 심사위원으로, 어머니 서사는 최소로 사용했던 미스터 트롯의 여성은 ‘그 남성’을 바라보고 키우는 팬덤으로 존재했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서사 속의 남자 가수들에 공감하고, 그들의 음악 서비스에 만족을 느끼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랑과 감사를 듬뿍듬뿍 받을 수 있는 여자. 미스터 트롯의 그들 캐릭터도 안전했지만, 남성인 그들과 관계 역시 안전했다.


안전.


엄마는 남진과 나훈아의 남성적 매력에서 성폭력의 징후를 보았던 게 아닐까? 송대관과 태진아의 흥에서 일부다처제의 폭력을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남성 질서를 연상하지 않았을까? 여성 트롯 가수가 싫었던 건, 말 못 함에 관한 울분에서 유래한 건 아니었을까?


엄마와 함께 미스터 트롯만 시청한 건 아니다. 엄마는 박원순과 관련해서 생떼를 쓰는 소위 민주당 머저리들에게 자기들도 다 똑같다고 일갈하셨고, 겁탈로 결혼을 하고, 경제적 착취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그 시대 남편들에 대해서 말하셨다.


왜 그녀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걸까라고 썼다가 고개를 흔든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또 변하지 않은 많은 걸 떠올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화하는 쪽에 서 있어야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후기> 엄마가 충격을 받으실까 봐 자세히 알려드리지 않았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성악가 출신 가수가 전 여자 친구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에게 미스터 트롯의 가수들은 서사의 주인공으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 남성 가수를 현실 속의 그들로 바라보게 되면, 충분히 슬픈 우리 엄마의 삶에 손톱만큼의 슬픔이 더 해질 것 같다. 엄마의 삶에 더 이상의 슬픔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손톱만큼의 슬픔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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