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의 이야기> 속 '나'
“네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에 새겨두려고 하지.” - <네 인생의 이야기> 첫 문장
기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네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네 아빠와 내가 어떻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보인다. 너의 엄마인 나와 아빠는 어떤 질문과 답을 공유한다. 세상이 어떠하든, 비극과 패배로 가득한 세상에서 위로와 환희를 안겨다 주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또 만나는 일. 바로 이런 질문의 순간.
“아이를 가지고 싶어?”
<네 인생의 이야기>는 SF 소설이다. 외계 지적 생명체가 등장하고, 낯선 생명체와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연하고 투명한 외계 생명의 모습은 경이롭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어려움도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상대성 이론을 알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물론 욕망을 자체 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처음, 중간, 중간의 후반부까지 소설 속 화자가 자신의 딸에게 건네는 말은 아름다운 회상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살 너와 언어의 용례에 대해서 대화하는 장면, 열여섯 첫 데이트를 기다리는 너의 들뜬 시간, 그리고 이런 깨달음의 순간.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나실. 이 생각은 네가 나의 복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또다시 일깨워줄 거야. 너는 매일처럼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나 혼자 만들어낼 수 있었던 존재는 결코 아니야.”
스물네 살 아이와 보낸 시간 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장면을 간직하고 있다. 울다가도 밤의 바람을 맞으면 바뀌었던 아이. 아이는 시원한 바람에 얼굴을 내밀고 어떤 멈춤의 순간을 보여주곤 했다. 강아지풀을 뺨에 대주면 찌푸리면서도 깔깔거리던 아이. 그리고 글로 다 옮길 수 없는 순간과 순간. 나 역시 다 커버린 아이를 바라보면서 비슷한 깨달음을 하곤 했다. “너는 나와 다르구나. 나는 그저 네가 옆에 있어서 고마울 뿐이야. 너는 내가 만든 존재가 아니라, 너 그 자체이구나.”하고.
아이가 나 아닌 다른 존재라는 사실, 너 그 자체라는 건 바뀌지 않는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아이와 나는 언젠가는 이 세계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생명이므로, 생명의 첫 번째 존재 원리는 탄생과 죽음이므로.
2014년 우울의 시간 동안 내가 곱씹고 곱씹었던 문장. “세상에 확실한 하나밖에 없다. 사람과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밖에 없다.” 그때 나는 세계에 분노를 표시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아이가 나 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 불안해고 우울했고 말하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다.
저 새로운 생명체 헵타포드는 ‘나’에게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인식 방식을 선물한다. 지구의 우리와 다른 언어, 다른 인식이다. 헵타포드는 미래에서 현재로, 내일에서 오늘로, 확정의 과거에서 미지의 현재로 세계를 이해한다. 그들이 나에게 건넨 선물은 어떤 선물이었을까.
나는 안다. 네 아빠와 너는 떠나가리라는 것을. 지금 내게 사랑을 표시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고,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너는.
기억이 아니었고 회상이 아니었다. 내가 네게 건네는 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직 남자가 사랑의 질문을 건네기 직전이다. 나는 헵타포드처럼 미래에서 현재를 내일에서 오늘을, 확정의 과거에서 미지의 현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게 사랑을 건네는 남자는 나를 떠날 것이고,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너는.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으리라. 어떤 이유였는지, 아들에게 “사랑은 왜 사는 것 같냐”는 질문을 했고, 아들이 답했다. “엄마,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인 것 같아.” 아들의 답을 들으면서 감동을 했던 것 같다. ‘맞아.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게 전부야’라고. 지금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아들은 자신의 답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연애와 우정과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서 아들은 삶의 이유를 찾을 테다. 또 긴 시간이 지나면 아들도 자신이 열 살 무렵 했던 대답을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른다. 태어났으니까 살아간다고.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야 하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확정된 미래로부터 지금을 선택한다. 기꺼이.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고통일 것 같은데. 예상하는 불변의 시간을 재연하는 삶은 고통일 것 같은데.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과 언젠가 영원히 헤어질 것이고, 헤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 했던 순간과 현재와 미래의 순간을 껴안고 살아간다.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싸우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체념하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 순간 환희를 선택한다. 그가 나에게 질문한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
나는 응이라 대답하고,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을 나누고, 너를 가지기 위해서.
두 개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