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노요코 cut piece 퍼포먼스
piece는 조각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나는 piece를 peace 그러니까 평화로 번역했다. ‘조각을 자른다’는 뜻이 ‘평화를 자른다’로 오역한 셈이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무대의 여성 예술가, 관객들이 하나, 하나 나와서 여성의 옷을 가위로 자른다. 겉옷부터, 겉옷 아래의 속옷, 브래지어까지 자르는 동안, 예술가는 꼼짝없이 앉아 있다. 얼굴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두 손은 자신의 가슴을 가린다.
조각을 평화로 오역한 나는 ‘옷을 자르는 행위가 평화를 자르는 것?’이라는 질문을 가득 안고 퍼포먼스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조심스럽다. 거침없는 난폭한 가위질도 있다. 점점 조심스러운 가위질 보다 난폭한 가위질이 눈에 더 들어온다. 브래지어를 자르는 행위는 그 가위질이 조심스럽든 말든 몹시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여성을 향한 폭력, 여성의 몸에 관한 폭력을 표현한 건가? 옷을 자르는 행위가 평화를 깨뜨리는 거라면? 하지만 이 퍼포먼스는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동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행동이 누군가 특히 여성을 향한 폭력임을 알려주는 건가?
동의? 동의의 전제는 당사자가 자율적인 인격체여야 한다. 기울어진 관계, 체제 자체가 피해와 가해 권력으로 이루어지다면 동의는 의미가 없다. 15세 이하 미성년자와 성인의 성관계가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해도 강간인 이유는 그래서다.
역시 불쾌한 퍼포먼스였다. 고문처럼 느껴졌다. 뭐야, 포르노 시청하고 비슷하잖아 싶었다.
고백건대, 나는 피해자 서사에 공감을 못하는 때가 많다. 방과후 아이들과 만날 때도, 가능한 피해자 서사를 지우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피해자로서 그녀들의 이야기들 듣는 데 한계를 느낀다. cut piece(평화를 자른다)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보는 게 힘들었다.
최근에야(정말 몇 년 안 된다) 이 공감하지 못함의 이유를 짐작했다. 놀랍게도 나는 공평하고 존중받는, 피해자가 아닌 여자로서 살아왔고 살고 있었다. 엄마 덕분이다. 천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여자 아이가 공부를 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엄마, 아이에게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엄마, 우리 엄마는 내가 이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그러라고 했다. (나의 이혼 사유는 제삼자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을 요소가 많다. 남편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다였으니, 아마 보통의 엄마라면 이혼을 적극 말렸을 게 분명하다) 이혼을 앞둔 나에게 엄마가 그랬다. “너는 혼자서 잘 살 거야.”
그제다. 이 주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던 엄마가 아침을 먹으면서 하나둘씩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몇 번이나 들었는지, 농담으로 한 백 번쯤 들은 이야기다. 내가 그랬다. “그래, 가기 전에 딸한테 말해야지.”라고. 사건 하나, 사건 둘, 사건 셋. 사건 넷과 다섯... 엄마의 큰 아이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탄생과 함께 미움을 받았다. 아버지는 친할머니에게 딸인 나를 아들이라고 말했고, 아들을 기대했던 친할머니는 고추가 달리지 않는 나를 보자마자 그 길로 병원을 떠났다. 그 이후는 다들 할 수 있는 상상 범위 안에 있다. 사건과 사건이 이야기되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사건이 등장한다. 가방을 사달라고 보채는 나에게 화를 냈던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는 그날 밤 내가 고열에 경기를 하자 큰 반성과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제 나한테 뭐든 사줘야겠다고. 엄마는 그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메더니 울기까지 했다. 엄마가 울었으니 나도 따라 울었다. 우는 데 좀 웃겼다.
“경기하는 바람에 가방 얻었으니 잘 되었네. 결론적으로.” 그리고 울면서 웃었더니, 엄마도 울다가 웃었다.
딸을 귀하게 여기면서 살아왔던 엄마의 어려움과 상처는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쓰기도 힘들고, 엄마가 엄마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쓰지 않겠다.
그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럴까? 엄마의 이야기는 할 때마다 사건 하나씩을 첨가한다.
cut piece를 대충 보고 나서, 다른 자료를 검색하고 나서야, 나의 오역을 알게 되었다. 평화가 아니라 조각이었다. ‘조각을 자른다’로 번역하고 나니, 퍼포먼스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조각, 조각, 조각. 조각으로 이루어진 존재, 조각으로 이루어진 삶,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조각으로 이루어진 평화.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조각은 큰 울림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이야기를 하다 그런다. ‘죽을 때까지 생각나겠지?’라고. 그럼 나는 ‘응’이라고 답한다.
극복, 해결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나는 엄마가 나한테 그랬듯이,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