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강박

미스 슬로운 이야기

by 열무샘

사회 초년 차였다. 이래서 이렇게 힘들고, 저래서 저렇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선배가 그랬다.

“왜 이래. 아마추어 아니잖아.”

선배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땠나?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인정받는 느낌, 자부심, 정리된 기분 등등.

누구나 어떤 영역 혹은 삶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갖고 있다. 내 경우 일과 관련해서는 선배의 ‘아마추어 아니잖아’라는 말이 중요한 키워드였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나는 돈을 받는 노동자,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신지은이라는 개인이 아닌 동료, 직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고 의식했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프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프로는 일터에서 일을 중심에 두는 사람이다. 나의 감정, 나의 상황을 염두에 두더라도, 일터에서 감정과 상황은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스 슬로운>의 슬로운은 나의 직업의식,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 직업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그녀는 집중하고, 해결하고, 이긴다. 집중하고 해결하고 이기기 위해서, 어떤 술수와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프로였기에 자신의 호스트가 될 남성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다. 당신의 아이디어는 “나이 든 남자나 할 법한 생각”이라며 타박할 수 있다. 권력에 반기를 둔다든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녀는 프로이기에, 프로로서 불합리하고, 엉터리인, 그리하여 엉성하고 유치한 작업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녀가 부럽고(능력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동의되고(직업 태도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 연민이 느껴졌다.


미스 슬로운은 약물 중독이다. 잠을 자지 않고,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머릿속의 일을 떨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끊임없이 각성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약, 약, 약.


어쩌지? 연민은 그녀를 향한 것이었을까? 혹시 그 연민의 대상은 내가 아닐까?


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지식 중에는 ‘성격장애’에 관한 이해가 있다. 습관, 성격, 사고방식 등이 사회적 기준에서 지속적이게 극단적으로 벗어나서 사회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애를 가리키는 용어로, 대략 10가지 정도의 성격장애가 있다. 장난과 진지한 마음으로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을 살펴보면서, 나는 어떤 장애를 가졌을까 시험해 보았다. 역시나, 예상했듯이 ‘강박장애’ 항목이 월등하다.

필요 없는 메일 반드시 지우기, 피시 바탕화면 범주별로 반드시 정리하기, 읽지 않는 톡 표시 넘어가지 못함, 이불을 개지 않은 상태 용납 못함, 무엇보다 의문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생각을 멈출 수 있는 지랄 맞음. 강박 맞다. 확실하다.


영화 속 미스 슬로운은 이기고 자기 길을 간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결코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것 같다. 각성상태를 위해서 계속 약을 먹겠지, 투약 횟수는 줄어들겠지만, 결코 끊지는 못하겠지.

나도 비슷할 것 같다. 그녀보다 덜하지만, 그녀처럼 이기지 못하지만, 그녀처럼 약을 먹지는 않겠지만, 어떤 식이든 각성을 위해서 몸을 움직이고 주사를 맞고, 편안한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 싶다.


결론. 오늘 자정 “내일 제가 오전에 글을 올리면 저는 강박 장애 맞습니다.”라고 했는데, 역시 강박 장애 맞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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