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누군가로

뾰족산에 사는 작은 리토라 이야기

by 열무샘

아이가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불안과 기대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기대가 더 많았을까, 불안이 더 많았을까. 무엇이 더 많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듯. 중요한 건, 아이가 스물네 살이 된 오늘도 기대와 불안을 확인한다는 사실. 아이가 내 몸에서 9개월의 시간을 보냈으니까, 기대와 불안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싶다.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데, 뇌 저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한 몸이었던 기억은 대신 살아줄 수도 있다는 착각을 만든다.


어떤 아이는 너무 예민하고, 어떤 아이는 너무 약하고, 어떤 아이는 너무 느리고, 어떤 아이는 너무 가난하고, 어떤 아이는 너무 쓸쓸하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한 아이들 틈에서 나는 어떤 기대와 불안을 갖고 있을까? 아무래도 내 아이만큼 불안과 기대를 품지는 않는다. 유전자의 힘은 대단하다. 불안으로 치자면, 너무가 더 많은 아이임에도, 기대로 치자면 어려서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음에도, 내 아이만큼은 아니다.

많은 아이를 만나고 경험하고 헤어졌으니까 불안과 기대 모두 낮아지고 옅어져지기도 했다. 이 많은 아이를 내 아이만큼의 불안과 기대로 대했다면? 끔찍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감각도 꽤 길러진 것 같다. 예민할 수도 있지, 약할 수도 있지, 느릴 수도 있지, 가난할 수도 있지, 쓸쓸할 수도 있지.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도 한몫한다.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은데, 끙끙대기 싫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몸과 머리와 마음이 최적화되었다. 어느새.


꿈을 꿨다. 햇볕이 잘 들어오고, 아이들이 편안하게 뭔가를 하고, 책이 가득 찬 도서관에서 나는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전 직장이었다. 선배가 옆에 왔다.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내가 그랬다. “선배보다 내가 훨씬 더 행복해요. 나는 방과후가 더 좋아요. 선배는 멈춰 있지만, 나는 계속 뭔가를 해야 하니까요.” 꿈속에서 나는 혼잣말인지 선배한테 하는 말이지, “거긴 아이들이 많으니까요. 뭔가가 계속 일어나니까요.”

단순한 꿈이다(복잡하거나 난해한 꿈을 꾼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작가가 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나라는 인간은 상상력이 별로 없어, 그러니 뭐가 되겠어 등등) 연휴 전에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그럴 수도 있다’가 길러졌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가 많아서다. 동료들에게 “그 꼴을 도저히 볼 수 없다”는 대사를 남발한 게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지랄 맞게 살다가는 오래 못 가지 했는데, 꿈에서 저리 다짐을 하다니. 역시 사람은 자기 본성대로 살아가야 하나 보다. 지랄 맞음을 바꾸려고 기를 쓰는 노력으로 지랄 맞음을 인정하는 게 효율적이지 싶다.

몇 가지 이유로 내가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게 뭘까 생각했던 것도 저런 꿈을 꾸게 했나 보다.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바라는 걸까, 그럴 수 있다고 긍정했다가도, 저 꼴 이 꼴 보기 싫은 이유에 숨겨진 기대 혹은 불안은 무엇일까.


지금은 책 할 줄 읽지 않는 아들은 어릴 때 그림책을 좋아했다. 중학생이 되고도, 그림책 절반을 폐기 처분하는 나한테 화를 냈다. 추억이 사라진다며. <뾰족산에 사는 작은 리토라>는 아들의 추억 때문에 남겨진 책이다. 엄마와 단 둘이 사는 아이 토마 이야기다. 조그마한 밭에서 채소를 키우며 살아가는 어느 날, 엄마가 병이 난다. 의사 선생님을 모셔야 하는데, 밭에는 멜론 하나밖에 없다. 그 돈으로 의사 선생님을 모셔올 수가 없다. 토마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약을 만드는 뽀족산의 마녀, 마녀는 멜론을 좋아한다. 토마는 멜론을 등에 지고 뾰족산으로 향한다. 가는 길은 험하고, 작은 키의 마녀는 심술궂다. 토마가 힘겹게 가져온 멜론은 필요 없다며 어서 돌아가버리라고 호통을 친다. 토마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마을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며, 마녀를 데리고 높은 탑으로 향한다. 높은 탑의 꼭대기로 가는 길도 험하다. 토마는 수많은 계단을 밟으며 씩씩하게 위로 올라가다.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리토라는 엉뚱한 사고 앞에서 깔깔거리며 사라지고, 토마는 또 어둠을 뚫고 리토라를 찾아간다. 결론은 해피 엔딩.


가슴이 환해지는 몇 가지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일 앞에 잘 웃던 아들은 뾰족산의 마녀가 소동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장면에 같이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일곱 살 무렵이었나. 열감기로 누워 있는 내 옆에서 간호를 하겠다며 그림책을 읽어 주던 아들이 떠오른다.(이렇게 아름다웠던 아들이 요즘 어떠냐면, 두 해 전에 독감에 걸린 나한테 얼마나 쌀쌀하게 굴던지 펑펑 울었다. 서러워서. 모든 어머니들은 포기해야 한다.) 엄마의 약을 위해서 모험을 떠났던 토마처럼 작은 아이였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해 모험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모험을 떠나는 토마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저리 게을러서, 저리 늘어져서, 저리 투성이 불안으로 이십 대의 아들을 바라보다가, 빨리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건, 일곱 살 여덟 살 아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랬어. 토마와 뾰족산과 멜론과 마녀 이야기를 좋아했었지,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하는 걸 기뻐하던 아이였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예민하고 약하고 느리고 가난하고 쓸쓸해도, 아이들은 자랄 테다. 예민함, 약함, 느림, 가난, 쓸쓸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테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른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 하지만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어떻게든 뭔가를 해야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자신을 인정하는 힘, 자신을 느끼는 힘, 성장을 원하는 마음, 스스로 자라려고 하는 의지, 생명과 세상에 관한 최소한의 관심, 생명과 세상에 관한 최소한의 호기심, 실수와 잘못을 인지할 수 있는 지성,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


<뾰족산에 사는 작은 리토라>의 주인공 토마는 약하고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스스로 길을 향했고, 어둠을 뚫고, 마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엄마의 병을 낫게 했다.


어제 오전 내내 어떤 단단함에 대해서 떠올렸다. 세계에 관한 큰 낙관이 없는, 인간의 본성에 혐오를 느끼는, 쉽게 사람을 믿지 않는 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만나는 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모순이라고 할지 모른다. 어쩌면 정신이 분열되었나 의심할 수도. 모순도 분열도 아니다.


그래서와 그러니까.


단단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능한 내가 만나는 많은 아이들이, 그리고 한 때 내 몸속에서 숨을 쉬던 아들이, 그리고 내가. 뾰족산으로 향하던 토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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