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색
작년 한 해의 대부분, 꽃을 보고 걸었다 꽃이 예쁘구나 하는 감탄도 있었지만, 같은 길의, 장소에 어떤 꽃이 언제 피는지 보고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혼자 놀라곤 했다. 흰색 꽃은 한 여름에 피는구나, 노란 꽃이 처음이구나, 바닥의 작은 꽃은 참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네, 가을의 꽃은 주홍이 많네 그런 식이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보라 빛 꽃은 다른 색에 비해 적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보랏빛 제비꽃, 아이들이 식물원에 갈 때 한 마디씩 던지는, 깔마가 좋아하는 수국이 피었네 하는 수국, 여뀌, 누군가 심어 놓은 팬지. 봄 까치꽃 정도다. 사춘기 때 친구들이랑 떨었던 수다가 떠오른다. 푸른 장미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가 푸른 장미는 불가능해라고 말하는데, 그 친구가 굉장히 높게 노옵게 보였다. 이런 걸 알다니, 굉장한데 싶었다. 언제였지, 푸른 꽃이 탄생했다는 기사를 읽고, 그때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도 이 기사를 알고 있겠지 하고. 품종개량이 된, 하나의 종이 된 푸른색 장미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푸른색이 아니라 연보라 빛이다. 완전한, 우리가 흔히 푸른색이라고 인지하는 푸른색 장미는 아직은 없다. 흰 장미에 인공색소를 주입한 잠깐만 푸른 장미는 있지만.
난 참 불가능을 싫어한다. 모든 건 가능해. 희망을 가져라는 식은 절대, 절대 아니다. 현실적인 사람이라 불가능한 뭔가에 손을 대기를 질색하는 편이다. 나를 오랫동안 옆에서 본 사람은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잘 안다. (며칠 전에 아들이 정확하게 말했다. 엄마가 겁이 많아서 새로운 시도를 안 하지라고.) 공상을 즐기는 건 아마 이 겁 많음의 결과일 수도 있다.(내게는 나만 즐기는 악취미가 있다. 끔찍한 스토리와 괴기스러운 시각매체를 즐긴다. 요즘 시오리와 시미코라는 만화에 푹 빠져있는데, 토막 난 머리를 애완동물처럼 기르는 두 여고생이 주인공이다) 겁 많음은 이런 대사를 종종 만든다. “그래,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해 보자.” 겁이 많아서, 현실적이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 따위는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이런 대사를 독백으로 대화로 치곤 한다.
요즘은 저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해 보는 내가 지겹고, 가끔은 초라하게 느껴지곤 한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 건강했으면 좋겠어, 젊었으면 좋겠어, 학위를 더 딸걸 그랬어, 그럼 할 수 있는 가지 수가 훨씬 더 많아질 것 같기도 하다. 잘 알고 있다. 돈이 많고, 건강하고, 젊고, 학위를 더 딸 수 있다고 암시하는 행위는 흰 장미에 인공색소를 주입하고 푸른 장미야라고 호들갑을 떠는 거짓말이라는 걸.
갑자기 그 사춘기 시절, 중학교 3학년 교실이 떠오른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4층 교실이었고, 우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베란다로 나가 점심시간 내내 수다를 떨었다. 푸른 장미에 관한 수다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친구에게 푸른 장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푸른 장미가 탄생했다는 기사가 그렇게 반갑지 않았을 테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나에게는 가능과 불가능에 관한 인지가 없었던 것 같다. 푸른 장미가 불가능하다고, 왜, 유전자가 그래서 그렇다고, 그럴 수 있구나, 과학의 세계는 참 신기하네 라고 놀랐던 건, 어쩌면 세계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인식의 처음 몇 개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건, 역시 불가능과 가능을 구분하고, 체념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또 그 시절 나는 모든 것이 놀랍고, 신기해서, 불가능과 가능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 시절을 거쳐서 지금의 내가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푸른 국화가 탄생했고, 푸른 장미가 탄생할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기사가 잡힌다. 그래. 나는 아니지만 세계는 또 하나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