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빛깔과 벌꿀 색

by 열무샘

별난 아이였을까? 많은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을까? 숫자로 가족 이야기를 만들곤 했다. 1은 어쩐지 아기 같고, 2는 엄마 같고, 나는 6이 되곤 했다. 색이 궁금했다. 왜 나뭇잎은 초록일까, 왜 태양은 노란색이라고 하지. 만약 어린 나의 상상과 궁금함에 관해서 수다를 떨어주었던 어른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의 나보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되었을까?

아무튼 아주 간혹 어린 시절의 질문을 혼자 한다. 왜 하고. 벌꿀 색은 왜 벌꿀 색이고 사막의 모래는 왜 사막의 모래 빛일까 하고.


잉글리시 페이전트라는 영화를 좋아해 몇 번 보았다. 영화로는 성이 안 차서 소설을 사서 읽었다. 여러 이미지와 이야기가 나를 당겼지만, 가장 강렬했던 부분은 사막 부족이 영국인 환자를 치료한 방식이었다. 화상을 입은 살에 밀랍과 꿀을 바른다. 얇지 않다. 두껍고 두꺼워서 숨 쉴 틈 없이 느껴질 정도로 바른다. 그리고 천으로 그를 꽁꽁 감싼다. 이들의 치료 방식은 유효했을까. 영국인 환자는 결국 죽었지만, 신비롭게도 이 방식으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 예술가 요셉 보이스다. 보이스 역시 영국인 환자와 똑같은 비행기 사고로 사막에 추락했고, 죽음 직전의 화상을 입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바로 저 벌꿀과 밀랍의 비의를 통해서. 보이스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샤먼임을 알리는 예술행위를 시연하곤 했다.


영국인 환자와 요셉 보이스의 고통을 잠시 젖혀 두고 생각한다. 지극히 종교적이고 지극히 아름다운 광경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치료가 진행된 곳은 사막이다. 모래바람과 모래언덕과 모래 평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곳. 너무 넓어서 공허한 사막에서 밀랍과 꿀과 천은 인간의 어떤 무의식을 자극한다. 누군가의 뱃속에 있었던 그때.


사막과 벌꿀의 색은 묘하게 닮았다. 공허함과 따뜻함, 광활함과 답답함은 다르지 않다는 연상을 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죽어버린 영국인 환자보다, 사막에서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던 요셉 보이스보다 더 나이가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왜 사막은 사막 빛이고, 벌꿀은 벌꿀 색일까, 왜 둘은 닮아 있을까 하고. 아마 어쩌면 영원히 모르지 싶다.


덧글 : 어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되어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대부분 심란하지 않은데, 그래서 또 심란할 때가 있다. 심란할 때마다, 아주 조금의, 손톱보다 작은 변화에 혼자 좋아하고 한다. 또 실망하겠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a의 특별한 흰색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