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죄책감: 언어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는 것

by JESSIE HEO

번역가로 살아가는 나는 꽤 자주 죄책감과 싸운다.

이 죄책감은 마감이 늦어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옮기고 있는 원문 언어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인식에서 온다.

내가 말하는 '오염도'는 불필요한 외래어 침투가 아니라, 번역 행위 자체가 내포하는 원문의 불가피한 변질을 의미한다.


번역은 '원심분리기'가 아니다


번역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원문의 핵심 아이디어와 감정을 마치 '액체'처럼 분리해 내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 액체를 한국어라는 그릇에 담는다.

하지만 번역은 순수한 성분만 분리해 내는 원심분리기가 아니다.

언어에는 단어 외의 수많은 요소가 섞여있다. 단어의 운율, 문장의 길이, 특정 단어가 문화적으로 내포하는 역사적 잔향 등이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옮길 때, 나는 의미는 전달할 수 있지만, 약강 오보격(Iambic Pentameter)이 주는 숭고한 운율은 포기해야 한다.

이 운율은 원문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인데, 한국어의 문법 구조에 맞춰 문장을 재배치하는 순간, 그 운율은 오염되어 소실된다. 이 소실이야말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죄책감이다.

나는 원문의 '몸'은 살렸지만, '영혼'의 일부를 놓친 것이다.



의미의 '흐름'과 문화적 '부유물'


또 다른 오염은 의미의 흐름에서 발생한다.

원문의 단어가 A, B, C의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면, 번역가는 한국어에서 그 세 가지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단어 X를 찾기 힘들다.

결국 나는 가장 확률이 높은 A의 의미를 선택하고, B와 C라는 풍부한 부유물(Nuance)은 버려야 한다. 버려진 B와 C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원문의 깊이는 얕아진다.

이는 특히 개념어를 다룰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어의 '정(情)'을 'Affection'으로 옮기는 순간, 원어가 쌓아온 역사적, 정서적 맥락은 희미한 주석으로 전락한다.

번역된 단어는 이미 오염된, 불완전한 대리물일 뿐이다.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


번역은 태생적으로 불완전성을 안고 태어난다. 완벽한 순수성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절망해야 하는가?

나는 오히려 이 오염의 숙명 속에서 번역의 의미를 찾는다. 번역은 원문이 가졌던 완전한 형태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훌륭한 작품의 핵심적인 정신만이라도 목표 언어의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문이 훼손되었다는 죄책감을 안고 번역하지만, 그 결과물이 한국어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경험을 제공할 때, 그 변질은 '창조적인 오염'으로 승화된다고 믿는다.

번역은 원문의 순수한 물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을 이용해 독자의 토양에 맞는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다.

이 불가능한 임무를 매번 수행하려 애쓰는 번역가의 고뇌야말로, 언어와 세계에 대한 가장 진솔한 고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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