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순서가 있다. 소중한 존재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건네야 했던 진심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식이다. 나의 경우, 사랑하는 이들이 곁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자책은 늘 늦게 찾아온다. "조금만 더 일찍 말해줬더라면" 혹은 "그때 솔직했더라면" 같은 가정들이 끈처럼 끈질기게 발목을 잡으며 오늘을 괴롭힌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기억을 현재로 끌고 와 반복해서 씹어 삼키곤 한다. 이렇게 지독한 후회 속에 갇혀 오늘조차 제대로 살지 못할 때, 떠올리면 좋을 시제가 바로 과거완료(had p.p) 이다.
영어에서 과거완료는 과거보다 더 이전의 시간, 즉 '대과거'를 나타낸다. 이 시제의 핵심은 단절이다. 현재까지 영향이 이어지는 '현재완료'와 달리, 과거완료는 특정 시점 이전에 상황이 이미 끝났음을 선언하는 벽과 같다.
"The train had already left when I arrived at the station." (내가 역에 도착했을 때,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이 예문은 사실 후회의 본질을 담고 있다. 내가 역에 도착한 순간(arrived)은 과거지만, 기차가 떠난 사건은 그보다 더 이전인 대과거(had left)의 영역이다. 내가 아무리 역에서 발을 동동 굴러도 떠난 기차를 세울 수 없는 것처럼, 과거완료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깨닫고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너의 손을 떠나 있었다"라고.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절의 사건을 '대과거'라는 먼 시간의 칸에 가두어 버리는 매듭인 셈이다.
나는 오랫동안 솔직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이 쑥스러워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 비겁함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라고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문법의 틀을 빌려 그 기억들에 '이미 완료된 일'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The movie had already started when I arrived at the theater." (내가 극장에 도착했을 때, 영화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내가 수업 시간에 자주 쓰는 이 예문 역시 후회의 속성을 품고 있다. 뒤늦게 도착한 시점(arrived)은 과거지만, 영화가 시작된 사건은 그보다 더 앞선 대과거(had started)다. 내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 영화의 앞부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서툴렀던 진심도 이미 대과거의 영역에서 끝난 일이었다. 이 단절을 통해 비로소 과거의 나를 기꺼이 보내줄 수 있었다. 그것은 떠난 이들에 대한 뒤늦은 예의이자, 더는 자책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화해였다.
퇴근길, 아빠는 언젠가 통화 중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언어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어.”
그 말처럼, 내가 후회 속에 갇혀 괴로웠던 이유는 내 슬픔을 설명할 적절한 시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무언가가 이미 끝났어야(had p.p) 그다음의 일(did)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진심은 과거의 내가 치른 값비싼 수업료(had paid) 덕분에 가능해진 결과다.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그립다. 하지만 더는 그때의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불완전했던 존재는 상실이라는 사건 앞에서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말처럼 나는 내가 아는 시제만큼의 세계를 산다. 후회를 대과거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나는 남겨진 오늘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