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길인가, 불려 온 길인가

스스로를 도구로 내어주는 법, 수동태의 미학

by JESSIE HEO

우리는 흔히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내가 주어가 되어 세상을 향해 동사를 던지는 삶, 즉 능동태(Active Voice)의 삶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의 이력을 돌아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장면들은 내가 주어로 움직인 순간보다 무언가에 의해 '이끌려간' 순간들이었다.

영어 강사라는 나의 직업 역시 그렇다. 나는 영어를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가 나라는 사람을 선택해 지금의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새벽 6시 , 첫 수업을 배정받다


대형 학원에서의 첫 수업을 기억한다. 초보 강사였던 나는 아마도 수강생이 가장 적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새벽 6시 타임에 배정되었다. 마이크를 타고 흐르는 내 떨리는 숨소리가 초보임을 들키게 할까 봐, 숨 쉬는 법조차 연습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강의 슬라이드마다 할 말을 빽빽하게 채워 대본처럼 달달 외우며, 나는 이 상황을 내가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는, 굳이 따지자면 '능동태적 강박' 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겁한 안도감도 섞여 있었다. "누가 이 새벽부터 공부를 하러 오겠어?" 하는 낮은 기대치 뒤에 숨어, 혹시 모를 나의 미숙함이 탄로 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합리화로 무장한 채, 무거운 강의실 문을 열고 입장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나의 계산과는 전혀 달랐다. 텅 빌 줄 알았던 강의실은 새벽을 깨운 부지런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정갈하게 씻고 나온 그들에게선 갖가지 스킨과 향수 냄새가 났고, 그 냄새는 새벽 공기를 타고 강의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과 간절함이 가득한 이 공간으로 내가 불려 온 것 같다는 기분. 주어의 자리에 앉아 수업을 진두지휘해야한다는 오만한 마음이 사라지고, 이들의 기대감을 채워야 한다는 거대한 소명 앞에 내가 세워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Calling', 나를 부르는 목소리


서양에서는 천직을 'Calling' 이라고 부른다. 재미있게도 이 단어는 수동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저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

즉, '불림을 받는 상태'를 뜻한다.

영어를 지독하게도 못 했던 고등학생이 영어 강사가 된 것은 나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다. 영어라는 언어가 주는 고통에 의해 밀려났고, 다시 그 언어가 주는 위로에 의해 붙잡혔다. 내가 주어가 되어 영어를 정복하려고 애썼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주어의 자리를 내려놓고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선명해졌다.

"나는 가르친다(I teach)"라는 능동태 뒤에는, 그 새벽의 향기처럼 나를 일깨운 사람들에 의해 "나는 강사로 만들어졌다(I was made)"는 수동태의 형태가 사실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수동태의 미학, 삶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법


수동태는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에 찾아오는 거대한 흐름을 인정하는 '수용의 언어' 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결정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능동태의 강박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나를 위해 예비된 더 큰 계획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부름'을 기다리는 수동태의 존재들이다. 내가 주어가 되어 세상을 휘두르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 때로는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새벽의 향기처럼 나에게 어떤 전율을 선물하는지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경이롭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장욱진 선생님의 말을 좋아한다. ‘삶이란 초탈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다 쓰고 가야겠다' 는 문장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고민하는 '쓰임'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수동태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새벽을 깨우는 향기가 되고, 누군가의 간절함을 채우는 문장이 되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

내가 주어가 되어 무언가를 이루려 애쓰던 날들보다,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어 그 새벽 강의실에 서 있던 순간이 더 찬란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언어와 이 마음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남김없이 다 쓰여지게(be fully used)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