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화살표가 되어준 책
좋아하는 누군가에게서 추천 받은 책 한권이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았다. 이 무렵 나는 감옥에 있는 누군가의 면회를 다니고 있었고 한글을 그리워 하던 그를 위해 책 속의 글귀를 편지지 위에 옮겨 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처해있는 그에게 건낼 수 있는 위로가 그 것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책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이자 최고의 노력 중 하나 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책은 내 굳어있는 머리를 여러 차례 때릴만큼 큰 여운을 남겼다.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차례차례 읽어내는 기쁨에 깊이 공감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책에서부터이다. 이 책을 이후로 책은 도끼다2, 여덟단어를 읽으며 박웅현이라는 사람의 깊고 울림있는 생각들을 따라가는 일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울림들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남아 이따금 마음이 시려울 때면 같은 책을 여러번 꺼내읽고마는 습관을 남겼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
▶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을 깨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또 한 편으로는 생각처럼 어렵지 않은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편협한 사고관을 깨달을 때도 있었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한정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여행을 떠날 수 없을 때면 책은 언제나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법을 알려주었다.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책이 가진 무한한 능력이며 나는 그 울림의 순간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폴레옹의 말대로 “지금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라는 겁니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식이 많은 친구들보다, 감동을 잘 받는 친구들이 일을 더 잘합니다. 감동을 잘 받는다는 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 누구보다 연약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는 몇 해가 지나도록 타인의 감정에 무디고 사람을 가려 믿는 일에 더딘 편이었다. 즉, 타인의 아픔에 누구보다 함께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며 녹초가 되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인생의 패턴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 것이 내가 가진 큰 장점이라 했지만 냉혹한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사냥감이 되거나 뒷담화의 먹잇감이 되기 쉬운 역할이었을 것이다. 차가운 현실에 스스로를 몇 번이고 자책하며 외로운 자취방에 누워 형광등에 그을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발견하게 된 글이었다. 꼭 차갑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책이 오래도록 앓고 있는 나에게 건낸 위로였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 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 처음 마주했을 때 숨이 막혔던 글귀였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하던 다른 작가선생님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중복된다며 손을 저으셨지만 저마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공감의 온도가 다른 것이기에. 나는 몇 날 몇일동안 이 글귀를 읽으며 슬픔에 대한 생각을 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면 오랫동안 이 글귀를 읽으며 마음껏 슬퍼하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풍화가 되는 슬픔이라면 슬픔의 농도도 점차 옅어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슬퍼할 수 있을 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나는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해주리라.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디자인은 단순한 멋 부리기가 아니다. 디자인은 깊은 생각의 반영이고 공간에 대한 배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책을 왜 읽느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집니다. 그전에는 산수유를 보고도 뭐 저렇게 특징 없는 꽃이 다 있어 했는데 이제는 나무가 꾸는 아련한 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 마치 라디오 주파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세상의 것들이 책이라는 채널을 만나면 음악이 되고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되기도 또 세상의 모든 소식을 들려주기도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더 많은 주파수의 무언가를 듣기 위해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읽고 싶다는 엄청난 욕망을 가지던 때가 한 때 있었다.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박의 위치 판단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 문장에 정말 많이 공감하게 됩니다. 이 구절은 제가 일하면서, 일상에서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 많이 떠올리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걸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때문에 나에 대한 파악을 하기 전에 내가 갈 곳만 보려고 하죠. 혹시 그래서 실수하지 않을까 나를 먼저 분석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삶, 즉 사람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그는 대화의 소재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찾았다. 그는 당신이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대신에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 순간순간을 온전히 씹어먹는 것 뿐이에요. 지중해에서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나는 결국 죽을 것이니 계속 슬퍼하는 비극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여성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서 지구 역사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시간을 계산한 부분이 나오는데요. 사십육억년 된 지구를 마흔여섯 살 된 여자로 상상해볼 때 최초의 단세포 생물들이 나타난 것은 그녀가 열한 살 때였고 공룡들이 지구를 배회한 것은 그녀가 마흔다섯 살이 넘었을 때, 그러니까 불과 여덟 달 전이며 인간의 문명은 지구라는 여자의 삶으로 친다면 불과 두 시간 전에 시작됐다는 겁니다. 정말 순간을 살고 있는 덧없는 길손입니다.
▶ 호주의 사막을 여행하며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35억 년 전 산소를 처음 만들어냈다는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살아있는 화석을 앞에 두고 나라는 존재의 유한함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삶의 허망함을 느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자리하고 이는 샤크베이 한켠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그 곳을 '세상의 모든 고요'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곳에서는 유일하게 티끌만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아서 아주 찰나같은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햇살 가득한 하루가 축복이었어요. 그런데 해가 지면 불현듯 슬픔이 찾아옵니다. 죽음에 대한 예고처럼요. 해가 지는 것처럼 언젠가 죽음이 온다는 기이한 슬픔이 밀려들어요. 지중해에 살지 않는 우리들도 감미로운 기쁨과 정반대의 순간들을 만나지요. 특히 일요일 오후 언뜻 해가 질 무렵의 먹먹함과 허무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합니다. 감미로운 기쁨이 있는 것처럼 뜻 모를 슬픔이 문득 찾아오는 것. 이렇게 삶이라는 건 열린 창문 사이로 밀려드는 햇살처럼 순간의 기쁨, 그리고 그 나머지의 슬픔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유한한 생명이 부여된 인간의 숙명일 수도 있겠네요.
인도를 다녀와서야 비로소 나는 ‘꿈’이라는 말의 참다운 규모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요즘 나는 꿈이 인도의 은유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여행지에서 그렇게 만났다가 그렇게 떠나 보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리 일생이 한갓 여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행길에서 우리는 이별 연습을 한다. 삶은 이별의 연습이다. 세상에서 마지막 보게 될 얼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한 떨기 빛. 여행은 우리의 삶이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 산티아고를 홀로 걸으며 만났던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 인연을 유지하고 만나는 것은 H뿐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과 '한국에서 보자' 혹은 '우리나라에 놀러와'라는 인사를 어렵지 않게 했지만 삶의 치열함 속에서 그 애틋했던 700km의 여정도 풍화되고 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닳은 탓이었다. 매일 묵묵한 걸음으로 늦은 시간까지 몸채만한 배낭을 메고 걷던 벨기에의 레이몬드 할아버지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되지만 나와 몇 번의 끼니를 함께 한 긴 여정의 길동무였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와 볼을 부비며 나눈 인사의 끝이 눈물이었던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긴 여정이 끝난 후, 나는 다음에 만나자는 인사를 쉽게 건내지 않게 되었다. 그 것은 기다리는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아픈 시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길 위에서 만난 누군가를 통해 깨달은 탓이었다.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
우리는 순간에 찍히는 사진과 같은 생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생의 각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과 바꿔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직 그 순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단어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단어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에 만난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 모두를 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
내가 누구를 선택해 결혼하는 순간 가능성은 좁아집니다. 그 전에는 다양한 인생이 아름답게 펼쳐지는데, 산에서 내려오고 나면, 선택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사라지죠. 그래서 사람들은 선택 후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거고요.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레빈처럼 원한 것을 얻지 못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가 생기잖아요?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자신의 몫인데, 레빈은 그 시간들을 조용히 견디는 쪽을 선택합니다.
다른 곳에 또 다른 인생은 더 이상 없고, 내가 지켜야 할 의무만이 날 죄고 있는 현실의 벽이 크게 느껴지면서 다른 생에 대한 동경이 커졌어요. 답은 여기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구 흔들렸죠. 남들은 지천명이라는데 전 이제 불혹을 맞았어요. 그리고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 다른 곳에 답이 있는 걸 알지만 이제 여기에도 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사는 이 삶을 잘 살면 답이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아요. 다른 어떤 생에 대한 동경도 없어요. 큰 부자, 사회적 명예와 성공보다 집 앞 공원을 지나면서 풍을 보고 초록을 느끼는 내 삶, 내 인생이 좋아요. 레빈이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그곳의 모든 것이 훨씬 더 간단하고 뛰어나다고 느낀 것처럼 저도 이제야 실존적 자각을 하게 된 거죠.
시골에서 그는 자기에게 맞는 장소에 있음을 스스로 똑똑히 알고 아무데도 허겁지겁 나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조급한 생각을 품고 있는 날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항상 허둥거리고만 있었다.
그 무렵은 그렇게도 아름답고 다가갈 수도 없을 것처럼 보였던 것들이 지금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고, 반대로 그 무렵에 가졌던 것이 지금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레빈은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절망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자문하는 것을 그쳤을 때는 마치 자기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는 씩씩하고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고 또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딸 연이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자가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냐고 물었습니다. 연이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살고 말 게 아니니까 앞으로 행복하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무엇인가 늘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제가 늘 말하지만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 삶의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일은 존경하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처절한 삶의 경험에서도 비롯되지만 가장 어렵지 않은 방법은 바로 책을 읽는 일 일 것이다. 호주라는 나라에서 내가 처절하게 외로웠던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읽고 그 속에서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난 것은 그리고 또 그 글들을 공유할 수 있었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은 내가 삐뚤어지지 않고 오래 걸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감옥 한 켠에서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알고 있기에 나는 이따금 손 끝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와 함께 가장 가까운 날들에 읽었던 책의 구절을 함께 보내곤 한다. 책의 일부를 함께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인생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자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년 겨울에 그가 한국에 돌아오면 나는 제주도로 떠날 예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협재 바다 인근에 숙소를 잡고 오래오래 책을 읽자고 그에게 말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