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에 익숙해지는 날이 오긴할까?

지옥 같은 출퇴근길 잠시라도 웃을 수 있다면

by Jessie



7호선에서 2호선으로 출근하는 불량 회사원의 출근길 단상






아침에 눈을 뜨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알람을 맞춰 놓은 시간에서 무려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서야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웬만해선 머리를 안 감고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2번이나 미뤘던 약속이 있는 날이라 어설픈 모습으로 출근을 할 수 없었다. 머리를 미친 듯이 감으며 머릿속으로 입고 나갈 옷을 구상했다. 정말 몇 안 되는 옷이지만 그중에서 제일 말끔한 옷의 조합을 찾는 것이 미션이었다. LTE급으로 화장을 갈기고 나니 어느새 여덟 시가 다 되었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아이라이너를 그리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린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횡단보도 신호등은 내가 건너기 직전에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다. 시크한 올 블랙으로 옷을 갖춰 입고 지하철을 향해 달렸다. 지옥철을 벗어나기 위해 2호선 신림에서 7호선 상봉역으로 이사를 왔지만 이 곳에는 더 끝내주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2호선 라인은 잠이 부족한 젊은 청춘들이 밀집되어 있어 7시 30분 전에 지하철에 탑승하면 그래도 쾌적한 환경에서 출근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곳 7호선은 그야말로 지옥의 노선이었다. 인파를 피해보려 오전 7시부터 7시 30분까지 출근 시간을 시험해보았지만 Ctrl+C, Ctrl+v를 누른 것처럼 지하철의 풍경은 다르지 않았다. 퇴근시간은 더욱 한 판의 시루떡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무튼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모르는 사람들의 체취로 가득한 7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상을 10개월째 이어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런 날들 중 가장 늦게 일어나 출근 피크인 8시 정각에 지하철에 오른 것이었고 말이다.




이 시간의 지하철에서는 몸뚱이의 소유 여부를 쿨하게 내려두어야 그나마 지옥 같은 서울 살이가 편해진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내 앞 대각선에 모두 멀끔한 남자분들이 자리하고 있어 출근길이 썩 나쁘진 않았다. (물론 눈으로 대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흰자가 재빠르게 스캔한 실루엣이 나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양 손을 X자로 교차하여 각자의 핸드폰과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서로의 체온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만약 책을 붙잡고 있는 손이 정확히 그 자리에 없었다면 내 앞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나는 서로의 두근거림을 몸통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물론 손잡이를 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허벅지에 나의 다리를 의지하고 있는지는 꽤 오래였고 말이다. 7호선이 2호선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더 뜨겁게 밀착되었고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실 키스만 하지 않았지 굉장히 농밀한 체온의 공유였다. 남편과는 키스를 언제 했는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이 정도의 서울살이라면 나는 한동안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하철이 군자에 도착한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지옥보다 더 지독한 지옥을 경험했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눈동자뿐인 상황인 것이었다.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뒷사람의 엉덩이 체온을 느끼며 이 순간 내가 여기서 방귀를 뀌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했다. 방귀를 직타로 맞으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일까에 생각이 닿은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또 다른 내 대각선 방향의 남자가 핸드폰 게임을 향해서인지 혹은 나를 향해서인지 모를 "아이씨"를 작게 읊었다. 그래, 아무리 급하더라도 이 인파 속에서 가스를 배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며 괄약근을 나무랐고 어린이대공원 역을 지나 나는 겨우 건대입구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또 다른 지옥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8시 52분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평을 내려놓으니 내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