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들여다본 할머니의 삶에 대하여
할머니는 겨울을 눈 앞에 두고 오일장에 시금치를 팔러 가셨다. 18살에 시집을 온 뒤 할머니의 인생은 단 한 번의 쉼표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할머니가 쉴 새 없이 움직이시는 것은 거의 기계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적어도 내가 기억 모두에서 할머니는 동이 틀 녘부터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셨다. 많은 이들이 귀농을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귀농이라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할머니를 보며 언제나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여름이면 장마에 넘어진 벼를 세우러 논으로 향해야 했으며, 가을이면 추수를 하고 감과 밤을 따야 했고, 겨울이면 메주를 빚고 다음 봄을 위해 씨앗들을 모아 모종으로 키워내는 일들을 준비해야 했으니 할머니의 삶이 고단했음은 우리가 자라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얼마 전부터 자꾸만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3남 1녀를 키워내는 동안 할머니는 3명의 서방님과 2명의 아가씨들까지 하루 13명의 세 끼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오셨다. 가난한 집에서 또 다른 가난한 집으로의 시집살이는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초가집에서 또 다른 초가집으로 팔리듯 가는 시집살이는 말이다. 오늘날 뉴스를 보면 별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미디어가 없었기 때문이지 지금만큼이나 별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느끼고 마는 바였다. 또 그것이 내가 얼마 전까지 봐온 고모할머니들의 모습이었고 말이다. 명절 때마다 할머니 집에 들러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을 내오라고 하셨던 고모할머니의 언행이 이제야 거슬리게 된 건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된 이유에서였다.
"너희 집은 할매 아니었으면 진짜 이렇게 살지도 몬했데이"
이따금 주변 친척들이 으레 말하던 말이 사실이었음은 얼마 전 할머니와 병원을 다녀오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떨고 있었다. 분한 마음을 풀 곳이 없어 부들부들 떨며 화를 삭였던 지난 시간들이 나이를 먹고서야 비로소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몇 번이나 짐을 싸고 풀며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시댁 식구들은 마지막까지 할머니를 괴롭혔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밭에서 세월을 보낸 할머니에게 보탬이 되기는커녕 시골에 올 때마다 양 손 가득 채소와 나물을 거둬 가는 시누이가 있는가 하면, 마지막까지도 치매에 걸려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킨 증조할머니가 있었고, 철부지처럼 한 평생 할머니의 어깨 한번 두드려주지 않고 티브이만 보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친정에 돌아오니 비로소 나는 그 전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였다. 결혼을 해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말을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한 평생 서러움을 안고 살아온 할머니는 며느리도 또 손녀도 본인이 당한 설움을 느끼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집 안의 가장 큰 손주였던 나는 단 한 번도 남녀차별을 느끼며 자라온 적이 없기에 남동생이 있음으로 으레 생기곤 하는 결핍이 존재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의 세대를 지나는 동안 시댁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끼니마다 쭈그려 앉아 쌀을 씻고 얼어있는 수도를 녹여야 하는 고생스러움이 증발한 지 오래였지만 이 것들은 모두 할머니와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임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여든이 넘도록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계시는 할머니를 볼 때면 나는 자꾸만 목이 멘다. 그래서 지하철 어귀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쉽게 걸음을 옮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여전히 시금치를 팔기 위해 부르튼 손으로 보따리를 들고나가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다짐하게 된다. 봄이 오면 할머니를 모시고 따뜻한 남쪽 여행을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