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10년 만에 은사님께 걸려온 전화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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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미팅으로 잔뜩 지쳐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가서 채 받지 못한 낯선 번호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수화기를 통해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단숨에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잘 지내고 있나~”


선생님은 15년 전과 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안부를 물으셨다. 선생님의 안부를 듣는 순간, 수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처음으로는 내가 그토록 따르고 좋아하던 선생님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안부도 여쭈지 못하고 살던 시절이 부끄러웠고 두 번째는 무엇이 중요한지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제자가 떠올라 전화를 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감사해서였다. 유일하게 내가 포옹을 나누는 선생님, 부모님께도 자랑스럽게 소개드렸던 나의 키다리 아저씨.

능력 평가를 치는 날, 수리 시간이 되면 일찍부터 엎드려 잠을 자던 사람 중의 하나가 나였다. 물론 문과반이기에 수리를 포기한 사람이 절반은 되었지만 9등급 혹은 18점의 점수는 나를 수리에서 더욱 멀어지게 했다. 그런 수포자(=수학포기자)였던 나를 2등급까지 끌어올려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시고 처음으로 일대일 면담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장래희망과 선호하는 학과와 학교를 써서 제출하던 때였는데 선생님은 '비행기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는 게 좋아서 '관광경영학과'를 선택한 나를 앞에 앉혀 두고 갈 수 있는 학교들을 묵묵히 찾고 계셨다.







선생님, 저 남동생도 있어서 사립학교나 서울에 있는 학교보다는 국립대를 가야 할 것 같아요




농공단지에서 공장을 다니시던 부모님은 언젠가부터 꿈 많고 활발한 나를 앉혀두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다'부터 '대학까지 다 보내줄 힘이 없으니 적당히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를 맨 정신에 해주실 수 없던 아빠는 매일 술에 취해야만 용기를 내셨고 반항기가 가득했던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악다구니를 지르고 몇 날 며칠을 끼니까지 거르기도 했지만 결국 결론은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것에 이르곤 했다.


갑작스러운 내 말을 듣던 선생님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던 눈빛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이 나에게 건네주신 곳은 바로 "제주대학교 관광경영학과"라는 글자였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는 결정이었지만 '관광'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에서 학문을 배우는 것도 그곳이 국립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나는 선생님을 키다리 아저씨로 믿으며 자주 병아리처럼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그런 선생님의 예쁨을 받기 위해선 수포자였던 내가 수학을 다시 집어 드는 수밖에 없었는데 수학의 기본도 모르던 내가 '수학의 정석'을 속을 게워내면서까지 3번이나 통째로 풀었던 기억은 그리고 2등급이라는 점수까지 받았던 일은 처음으로 나에게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열심히'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울 만큼 성적은 그 언저리에도 가지 못해서 선생님과 부모님은 그런 나를 두고 언제나 마음 아파하셨다. 꾀를 부린 적도, 잠에게도 한 번도 관대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나를 두고 부모님은 그저 더 잘 먹이시는 것이 해주실 수 있는 전부였고 선생님은 종종 선생님 앞으로 배송되어 오는 문제집들을 몰래 챙겨 내 손에 말없이 쥐어주곤 하셨다. 나는 어찌 되었든 선생님의 화살표를 따라 제주도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내 대학생활은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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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되고 방학이면 돌아왔던 고향에서 나는 이따금 고등학교를 찾아가 선생님들과 점심을 먹곤 했다. 그러나 20대 중반 그리고 또 후반이 되어갈수록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학교를 찾는 일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요새 뭐 하고 있니?”라는 인사가 주는 중압감이 무거웠다.

그 시절의 나는 해외에서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던 중이었고 가벼운 주머니로 덜컹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학교를 찾는 내 모습이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직장을 잡으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면, 떳떳한 직장을 가지게 되면...’이라는 조건들은 결국 나를 아끼던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그 조건들이 충족되는 시간은 사실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나는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 번듯하거나 안정적인 직장은 아니었고 사실은 선생님께 전화를 받은 날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주신 선생님께 “강남에서 일하고 있어요”라는 두루뭉술한 대답만 하고 말았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말씀이 마음에 남기는 파장은 대단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선생님에 대한 죄송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이른 밤부터 이불속으로 들어가 선생님의 마음을 떠올렸다.



낯선 서울에서 매 달 대출 이자를 갚느라, 먹고살 궁리를 하느라 정작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살고 있는 나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떠올려주신 선생님. 얼마 전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문득 떠올라 전화를 거셨다고 했다. 몸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그 시절의 내 한결같았던 화살표를 떠올린다. 흔들림없이 묵묵하게 나를 응원해주시던 그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장면들.




더 늦기 전에 올해는 선생님을 뵈러 가야겠다.

그동안 숱하게 말로만 했던 안부를 뒤로하고 올해는 내가 선생님께 따뜻한 밥 한끼를 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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