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그리고 그 후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했습니다.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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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잊어버린 줄 알았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분명 몇 년 전 나를 지옥 끝까지 밀어 넣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자살을 선택한 20대의 젊은이 사연을 마주하고서는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만약 그 시절에 내 곁에 그가 없었다면 혹은 친구가 부산역으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겪었을지도 모를 상황들을 뉴스로 마주하면서 나는 2017년 그 날로 돌아가 있었다.



호주에서 몇 년간 생활을 해오던 나에게 뉴스를 보는 건 꽤나 먼 이야기였다. 먹고사는 일도 채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아르바이트와 일 그리고 겨우 나를 지탱해주던 달리기를 이어가는 것이 내 하루의 전부였다. 천둥벌거숭이의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라는 사람은 세상 흘러가는 모습을 몰랐으니 범죄의 표적이 되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나는 호주에서 갓 들어와 한 달 후에 있을 뉴질랜드 행사를 떠나기 전 시골집에서 쉬고 있었다. 커피를 좋아하기에 단골처럼 자주 들리곤 하던 카페에서 여느 때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문제는 그때 나에게 걸려온 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김민수 검사에서부터 시작된 통성명과 대포통장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야기, 전화를 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야기, 출국금지 조치로 해외에 나갈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장장 6시간을 그 김민수 검사에게 홀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이와 연락을 하는 순간 경찰 조사 협조에 응하지 않는 행위가 되기에 고발당할 수 있는 협박에서 시작해 셀룰러 데이터 차단에서부터 그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도록 6시간의 릴레이 통화를 이어갔다. 심지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계좌가 어느 은행인지 대략 어느 정도의 금액이 들어있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나는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돈 한 푼 모아둔 적이 없는 나였기에 받을 피해가 없었지만 숨어있는 내 통장 한편에는 엄마가 평생 모아주신 보증금이 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이따금 그 돈이 잘 있는지를 나에게 물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돈이었다.


동네의 농협에서 엄마가 평생 모아주신 보증금 2000만 원을 뽑아 들고 나는 우습고 허탈하게도 사기꾼에게 그 돈을 건네고 말았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나를 집에서 아주 먼 부산 남포동의 농협 앞으로 향하도록 만들었고 그곳에 도착한 나는 다시는 걸리지 않는 번호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면서 그제야 내가 마주한 것이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한 번이라도 '김민수'라는 이름을 네이버 검색창에 쳐봤더라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텐데 나는 정신을 놓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모르는 동네의 길거리에서 포효했다. 그 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건 조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세상을 모두 잃은 것만 같았다. 심장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들을 포기한 채였다. 한참을 울부짖다 경찰에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 전원을 켰을 땐 몇 시간째 연락이 되지 않는 나에게 화가 잔뜩 나 이별 통보를 한 남자 친구의 문자와 카톡 그리고 부재중 전화 수십 통이 찍혀 있었다. 뒤늦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남자 친구는 내가 처한 상황을 듣고 제일 먼저 나에게 심한 욕을 뱉었다.


"미친년아, 정신 차려"



한 번도 욕을 한 적이 없던 사람에게 욕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도로 가장자리에서 나쁜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었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그 당시 서울대입구역에서도 아주 먼 비탈길의 고시원에 살고 있었고 라면 하나로 4번의 끼니를 때울 때였으니 ktx를 타고 내려오는 일조차도 어려웠을 때였다. 급하게 급전을 빌려 밤 9시 30분 ktx를 타고 급하게 나에게로 향했고 그와 함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를 임시 보호하고 있던 경찰관님과 통화를 해 부산역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 당시 친구는 만삭의 배를 한 임산부였는데 급하게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해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부산역으로 나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그 날 친구의 발에 신겨져 있던 짝짝이 양말과 삼선 슬리퍼를 나는 여전히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를 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울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기차를 탄 채 본인의 집으로 나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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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경찰서에서 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경찰은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들여다봤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죽고 싶은 충동을 몇 백번이나 씹어 삼켰다. 그 순간의 비참함을 억지로 견디며 나는 조사 진행조차 안 되는 경찰서를 그 후에도 몇 번이고 찾아가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CCTV 확보와 범인 제보를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출국을 앞둔 1주일 전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일을 하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에 있던 친구가 경찰과 연락을 하며 나에게 용의자 사진들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하나 같이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보내온 사진에는 나에게 돈을 받으러 왔던 사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범인이 잡히면 모든 것들이 끝날 줄 알았지만 그 사람은 제일 하위에 있는 '전달책'으로 돈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밖에 한 것이 없기에 그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크지 않았다. 나 외에 사기를 당한 이는 모두 6명이었지만 그 전달책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 37만 원을 나눠 가지고서도 사기 금액은 손톱만큼도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으니 형량을 채워야 한다는 대답으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 이후 경찰에서 오는 연락은 더 이상 없었고 나는 억지로 그 일들을 잊어갔다. 부모님께 상처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나는 신대방역의 해가 들지 않는 원룸에서 마이너스로 셋방 살이를 시작하여 그 시절 곁을 지켜준 남자 친구와 신혼살이를 시작했다. 힘든 시작이었지만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김민수라는 이름을 들은 것이 바로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였다. 평소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그가 먼저 뉴스와 그 남자의 목소리를 공유해왔고 나는 몇 초도 채 듣지 않은 채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그는 몇 년의 시간 동안 같은 수법, 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준 고통을 아니 그보다 더 참혹한 짓들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뉴스에서 밝힌 그 중간책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중국 국적의 부부였고 부인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선처를 빌었다고 했다. 그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얼마 전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세상을 떠난 아들의 어머니는 법정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순수한 사람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친구가 공유해준 이 기사를 보고서 나는 허탈했고 또 눈물이 났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위로에 나는 애써 잘 지내는 척, 잊은 척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보이스피싱이나 사기를 당했다고 하면 피해자의 무지와 멍청함을 쉽게 이야기하곤 했기에 나는 사람들의 비난과 한심한 듯 바라보는 눈빛이 무서워 오랫동안 당당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평생을 힘들게 양말을 기워 신고 시장의 고무줄 바지를 사 입으며 돈을 모은 부모님께 말 못 할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나는 어떻게든 부모님이 준 것들은 버리지 못하고 집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몇 년이나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과거의 내가 저지른 실수를 위로받는다.

청년의 어머니가 법정에서 하신 말씀은 사실 내가 어른들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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