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 그 위대한 세 글자

엄마라는 또 다른 직업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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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명에 대한 사회의 작은 배려



언젠가부터 서울의 지하철에는 핑크색 의자가 등장했다. 임산부 보호석이라고 불리는 그 좌석은 대게는 비어 있을 때가 많았고 이따금 자리가 채워진 날이면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있는 사람들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곤 했다. 전혀 배가 나오지 않은 사람부터 만삭의 여성까지 그 자리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가끔 있었지만 그 자리는 자주 주인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상이 반영되는 장면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고나 할까. 나와 남편 역시 가진 것 하나 없이 맨 몸으로 결혼을 했으니 아이를 낳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하나 둘 먹고 주변의 난임 소식을 어렵지 않게 듣게 되니 모든 것들은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 찾아오는 생명이 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하기로 했고 어쩌면 그 날 이후 내 시야에는 그 분홍색 의자가 더 자주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일지도 몰랐다.



지하철을 탈 때면 언제나 그 분홍색 의자 근처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곤 한다. 곧 엄마가 될 이들과 사회의 작은 배려를 바라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때였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꼭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곤 했다. 이를테면 젊은 남자가 이어폰을 끼고 잠자는 척을 하며 임산부석에 앉아 있거나 혹은 화장을 연신 두드리는 여성이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있는 임산부를 앞에 두고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말이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면 늘 누구보다 먼저 화가 나곤 했다. 때마침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임산부 좌석에 대한 안내를 듣고서도 안하무인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사회가 여전히 약자를 대하는 태도인 것만 같아서 모래를 잔뜩 씹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워킹맘과 원더우먼, 중간 어딘가




그래도 나는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예민하지 않았던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던 터라 결혼을 하거나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이 없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100일 된 아기를 어린이 집에 두고 회사에 출근해야 하거나, 열이 나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회사에 어렵게 조퇴를 받아야 하는 상황들이 워킹맘이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주곤 했다. 아이를 가지는 일도 어려운데 아이를 품고 있는 시간들도 충분히 배려받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실 나는 임신을 하고서도 임산부 좌석에 한 번도 앉지 않았는데 한 할머니께서 임산부 좌석에 앉아있는 여성분께 임산부인 걸 증명하라며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성분은 울먹이면서 다음 정류장에 내리셨는데 그 기억이 어찌나 생생한지 배가 아팠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서서 목적지까지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매 순간 모든 경험들에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삭막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남편도 없는 서울에서 홀로 지낼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엄마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일은 그만뒀지만 대신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스스로의 가능성을 조금 더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누군가 직장을 물으면 언제나 임산부라고 대답했다. 아이를 품고 키워내는 것도 어쩌면 훌륭한 역할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예비엄마의 신분이 되어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에겐 원더우먼을 꽤나 닮아있다. 아침 8시에 출근을 하고 저녁 7시면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는 그렇게 다시 저녁 상을 차리고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과일을 깎는다. 내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빨랫감도 엄마는 매일 방을 둘러보며 챙겨가고 강아지 밥과 간식도 챙기니 엄마에겐 내가 온 이후 자식이 한 명 더 늘어난 셈이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자식에게는 늘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어릴 때는 귀찮을 때가 많았는데 서른을 넘기고 나니 부쩍 더 먹먹하게 느껴진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이제 34살이 되었으니 25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 것이다. 그렇게 늘 씩씩하던 엄마였는데 그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워킹맘으로 가지고 있는 유일하고도 선명한 트라우마여서 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 나이 10살, 동생 나이 6살 때의 일. 그 당시엔 형형색색의 신발끈으로 집 현관 열쇠를 목에 걸고 다니는 일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노느라 해 질 녘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유치원을 마친 어린 동생은 일찌감치 집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목에 걸린 열쇠로 문을 열려고 했지만 바람에 밀려 잠금장치가 뻑뻑해진 문을 채 열지 못한 동생은 복도에서 몇 시간째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해 질 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차가운 복도 끄트머리에서 발견한 동생은 기다림에 지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추운 복도 바닥에서 잠든 동생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는지 엄마는 얼마 전에도 소주를 두어 잔 마시더니 눈물을 찔끔 찍어냈다. 몇 년째 같은 이야기를 하건만 워킹맘으로 사는 서러움과 미안함이 잊히지 않는 까닭인가 보다.




엄마는 서러움을 딛고 우리를 키워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 또다시 집안일을 시작한다. 결혼을 하고서야 그런 엄마의 모습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엄마에게 쉼표를 주기 위해 먼저 설거지를 하고 저녁을 준비하지만 어디선가 또 다른 집안일을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당신만큼 부지런히 살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아마 당신의 반만 닮아도 나는 꽤 괜찮은 엄마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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