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도 인생이니까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사는 법

by Jessie

호주에서 돌아온 후 나는 자주 조바심이 났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뒤늦게 한국에 돌아온 스스로가 패배자인 것 같기도 했고 남들보다 이뤄놓은 것이 한참이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 때면 자주 키보드 앞에 앉아 글을 썼다. 기쁠 때 쓰이지 않는 글은 이상하게도 잔뜩 의기소침해진 날 날개 돋친 듯 쓰였다. 우울에 젖어 마음의 동굴에 깊이 숨어있는 동안 나는 나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며 퇴고 작업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이번에 빌린 책은 얼마 전 읽었던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라는 책의 김신지 작가가 쓴 책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난생처음으로 자발적인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작가의 문장들을 옮겨 쓰다 보니 그녀의 또 다른 책들이 궁금해졌고 자연스럽게 <평일도 인생이니까>라는 제목에 끌려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도 늘 금요일을 기다리며 소중한 평일들을 아쉽게 흘려보낸 사람이 아니던가.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의 시간들 역시도 육아에 치여 그 소중함을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주 순간을 담아 두기 위해 애를 쓴다. 어렵사리 시작한 일기 역시도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노력. 언젠가 샛별이가 훌쩍 자라 아쉬움이 밀려오는 날,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오늘의 감정들로 나를 위로해주어야겠다.





p9 사는 일이 어려워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마다 글을 썼다. 여기 실린 글들은 미처 대화가 되지 못한 흔적인지도. 한 권의 책을 펴내는 일이 부디 대화의 시작이 된다면 좋겠다.




p33 “그 사람들은 영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거겠죠. 하고 싶으면 어떤 식으로든 하면 됩니다. 그런데 되고 싶어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성공한 누군가를 동경하면서요.”

/ 이숙명 <혼자서 완벽하게> 중에서




p33. 그리하여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더라도, 매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p34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되려는 욕심이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p67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으로 자라, 내 행복은 내가 책임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른으로 사는 기쁨은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p109. 그건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편하게 머물고, 어떤 디테일을 좋아하는지 오랜 시간에 걸쳐 알아낸 뒤 스스로에게 조금씩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 아무거나 먹고 아무 물건이나 곁에 두고 아무렇게나 하루를 여닫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것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고 오늘은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 그렇게 보내는 일상이야말로 단단히 네 다리로 버티고 서서 나라는 사람을 지탱해 준다. 삶의 굴곡에도 기우뚱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p164 사전에서는 제철을 ‘알맞은 시절’이라 풀어쓴다. 알맞은 시절. 제철, 이라 부를 때보다 어쩐지 더 마음의 정확한 지점에 가 닿는 표현이다.




p205 남을 부러워할 시간에 차근차근 내가 되어 가는 게 낫다. 진짜 어른은 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p270 그래서인지 가끔씩 깊은 밤,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생각한다. 나하고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혼자 있을 때 깃드는 고요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너무 많이 만나지 않고, 너무 많이 말하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해야 할 말들만 한 뒤 다시 혼자로 잘 돌아오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는 혼자 있는 법 역시, 평생을 살아가며 배워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p276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 장면은 때로 자연이었다가 때로는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p286 엄마에게 나는 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엄마는 내게 대부분의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친구가 '작년, 오늘'의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내 기억 속에서는 까맣게 지워진 장면들이었는데 그녀의 일기장에 담긴 덕분에 수면 위로 추억들이 떠올랐다. 육아에 지쳐 오늘이 몇일인지 혹은 무슨 요일인지도 잊어버린 채 살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기록하는 습관은 좋은 자극이 되었다. 매일 눈을 뜨면 시작되고 아이가 자면 끝나는 반복되는 육아도 기록을 위해 책상 앞에 앉으면 어제와는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몇 줄 되지 않는 일기지만 일기장을 매일 밤 꺼내는 것은 샛별이가 자라는 하루하루를 조금이나마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은 나의 욕심이자 하루의 빛나는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책의 뒷부분에서 작가의 엄마가 운전을 배우는 구절을 읽으면서는 아주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나 역시도 엄마를 떠올리면 늘 할 수 없을까 봐 걱정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운전도, 처음 와보는 서울의 지하철을 타는 일도, 쿠팡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일도 말이다. 새로운 세계를 보기 위해 혼자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와 미국, 호주로 향하던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는 늘 하지 말라는 말보다 굶지 말고 다니라는 말과 함께 아침밥을 차려주곤 했었는데 과연 나는 샛별이가 자라면 하지 말라는 말 대신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다 보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제는 되고 싶은 것을 쫓아 늘 목말라하는 삶 대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리운 호주에 대한 글과 그림을 이따금 그리고 혼자인 시간들을 누구보다 잘 보내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좋은 문장과 풍경으로 채우다 보면 인생의 즐거움을 위해 주말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행동과는 조금 더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고 있다면 그것 역시도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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