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찾기 위한 노력

by Jessie
KakaoTalk_20220203_010532514.jpg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보통은 "-하길 잘했어"라는 경험담을 자랑하고 싶을 텐데 이 책은 덤덤하게 그만두길 잘한 일들을 가득 담고 있다. 그리고 읽다 보면 정말 그만두길 잘했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견디기, 존버를 독려하는 사회에서 그만두기를 해내는 것은 무엇보다 용기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작가가 빼곡하게 써 내려간 목록을 함께 읽다 보면 결국에는 작가가 스스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들을 조심스레 엿보게 된다. '꽃 정기구독', '책으로 방공호 쌓기', '타이레놀 먹기'처럼 일상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지만 '약점 숨기기', '혹독한 자기 검열', '재난 속에서 주눅 들기'처럼 성격에서 유래된 이야기들도 발견하게 된다. 어떤 구절을 읽으면서는 숨기고 싶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른 구절에서는 함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남편'이라는 사람의 습관을 찾아내기도 했다.


올해는 거창한 새해 계획 대신 '그만두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써 내려가 보면 어떨는지.








p5 떠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무언가 남겨져 있고,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것이 나를 밀어내는 작은 실랑이의 현장이었다.



p8 생활 속에서 그만둔 목록을 적는 것은, 내가 무엇을 그토록 열망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p12 고독에 몸부림치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고독이 나의 모국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독을 품지 않으면 말문이 트이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컸다. 고독과 내가 서로를 떠날 수 없다면, 나는 이 고독을 따뜻한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p18 얼마 전에는 ‘나무말미’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어 뜻을 찾아보았다. ‘오랜 장마가 잠깐 동안 개어 풋나무를 말릴 만한 겨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단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험을 실로 오랜만에 했다. 낯선 단어를 곱씹으며 기대어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겨를’이라는 순간이 필요했던 시간에 대해서. 비도 눈도 유독 많이 왔던 기나긴 계절을 지나오면서 내게도 필요했던 겨를이 제때 찾아왔었나. 헐렁한 손목시계를 괜히 만지작거리는 시간이었다.



p20 오래된 문장마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야기가 맺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신기하게도 아무런 다짐 없이 잘 살고 싶어 진다. 예전과는 다소 달라진 생각과 취향을 발견할 때에도 좋았다. 스스로 변함없다고 착각하는 나를 자주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문장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경험은 은근히 흔하지 않다. 생활에 부대끼거나 몸살을 앓으며 겨우내 쓴 몇 줄의 문장이 오늘에서야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은 일기의 기막힌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p21 특별히 대단하거나 극적이지 않더라도, 혹은 아무런 맥락 없는 하루였더라도 그날 느낀 감정이나 지니게 되었던 마음을 기록하는 것은 나의 흔들림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몹시 부끄럽고, 훗날에 그것을 잃을 나는 아름답기를 바랐다.



p62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했던 20대의 일기와 다르게 30대의 일기는 무언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p77 집에 들어왔을 때 과일 냄새가 진동한다는 것은, 어디선가 과일이 짓물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일이 씩씩하게 울고 있는 것을, 싱그러운 향이 난다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p81 버티다 보면 답이 있겠지, 그런 망망대해의 표류 속에서도 계속 믿음을 출렁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안간힘은 자신도 모르게 꽉 붙들게 되고, 어떤 안간힘은 스스로 벼랑을 만들어 초인적인 순간을 일으키기도 한다. 버티고 있는 내게 계속할 수 있는 다독임을 주기 위해서는, 버티지 않아도 될 만한 일을 선별하는 깨끗한 지혜가 필요한데, 사실 이 책에 쓰는 이야기들이 아마도 그런 것을 찾아가기 위해 그만둔 것들이 아닐까.



p88 글을 보면 내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마치 호숫가에 내 얼굴을 비춰보는 일처럼. 그 투명함에 크나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생활을 돌아보라, 그것은 자화상을 그려보란 말과 다르지 않다. 표정에 드리우는 생활의 주름들을 빼꼼 헤아리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94 나약한 사람이 어떻게 그 나약함을 다루며 살아가는지를 볼 때 나는 지혜를 읽는다. 질겨진 점성으로 끝내 투명함을 잃지 않는 생명력에서 나는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전해 듣는다.



p106 혹한기 속에서 내게 남은 여름을 세어보며 썼던 시집. 무언가를 끝내고 싶은 절박한 마음속에서 시집을 집필하고, 나는 내가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지 확인했다.



p111 나의 느슨함을 받아들일 때. 내가 지나온 직선들로 곡선을 발견할 때. 자기 검열의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았다.



p135 아마도 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밤의 그 부연해지는 일을 사랑했던 것이다.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정확하거나 신빙성 있게 살아야 하는 낮과는 달리 밤은 느슨해져도, 묘연해져도 상관없었다.



p137 저녁에 지어놓은 문장이 아침에서야 다 식어 형편없이 보이게 되는 일이 조금 우스웠지만 그 수치스러운 기쁨을 아침에만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 후로는 급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아침에 글을 쓰거나 고치고 있다.



p143 마음이 가난해질 때면 나는 나의 적이 되기도 한다. 겨울에는 그런 증상들이 나날이 깊어져 간다. 혹독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기도 한 날들이다. 겨울이란 많은 것을 내버려 두게 만든다. 그게 마음에 찾아오는 고난의 근원이고, 무기력함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서로 혹한기에 들어서게 될 때가 있다.






언니의 책상 위에 놓인 일기를 훔쳐 읽는 기분이었다. 의미 없이 혹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던 일을 그만두기로 한 뒤 그녀의 모습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나의 일상을 한 번쯤 뒤돌아보게 된다. 그만두어도 괜찮을 일들을 혹시 괜한 아집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특히나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다짐이 가득했던 20대의 글과는 달리 '무언가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 가득한 30대의 일기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이고 공감했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과 한참이나 닮아있는 문장이었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하기 위해서 올해에는 그만두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보기로 했다. 하길 잘한 일보다 하지 않기로 한 일들 속에서 비로소 자기반성이 이뤄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평일도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