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가족의 몫
나에겐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내 나이가 세 살이었을 때 태어나 100일도 안 되는 삶을 살고 떠났으니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심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어른이 된 후라서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엔 꽤 무거운 아픔이었던 까닭이었다.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엄마와 아빠 사이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슬픔의 언덕. 아빠와 술잔을 기울였던 그날 이후로 나는 여전히 그곳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나는 아빠와 단둘이 산책을 하고 가볍게 한 잔을 기울이러 동네 노포에 들어섰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빠가 잠시 살다 간 동생에 대한 언질을 했다. 중요한 것조차도 자주 깜빡깜빡하는 나였지만 그 장면들이 쉬이 잊히지 않는 건 내가 알지 못한 가족의 비밀이 있었다는 데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아빠는 소주를 한잔 들이켜고선 귀퉁이가 잔뜩 낡은 가죽 지갑 깊숙한 곳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세월의 흔적을 군데군데 머금은 편지였다. 몇 번을 정성스레 접어놓은 누런 편지는 이곳저곳이 얼룩으로 번져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나는 그 얼룩들이 눈물이었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눈물에 젖은 글자들을 가까스로 읽어내고선 차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처했던 그날, 나는 세상에는 잊혀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일이 있고 몇 년 후, 이번에는 엄마가 덜컥 동생의 이야기를 꺼냈다. 단지 너에게 동생이 있었노라고 말이다. 이야기가 거기서 진전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던 것은 엄마의 그치지 않는 눈물 때문이기도, 아빠와의 시간에서처럼 어떤 위로를 건네어야 할지를 아직 알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지만 엄마 역시 아빠에게는 내색하지 않은 채 엄마만의 방식으로 동생을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부부 사이의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와 아빠는 그날 이후로 서로에게 그 아픔을 내보인 일이 없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늘 머무를 수 없었기에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아이를 낳았다. 장남이던 아빠에게 나름 간절했던 아들이었다. 동생의 이름은 먼저 별이 되어버린 아이의 영향을 받아 나무처럼 길고 오래 살라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동생이 덤덤하게 말했다. 서른 해가 넘어서 처음 알게 된 이름의 유래였다.
엄마는 늘 나에게 아이를 낳아봐야 엄마의 마음을 알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땐 고개를 저었지만 아이를 낳은 후로는 자주 엄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제 갓 200일을 넘긴 아기를 보며 그날의 엄마가 동생을 보내고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감히 상상해본다. 동네 병원에서 울산의 큰 병원 그리고 다시 부산의 큰 병원으로 옮겨가면서 온기가 식어가는 아이를 부여잡고 얼마나 가슴을 쥐었을지, 집으로 돌아와 억지로 하루하루를 사느라 채 슬퍼하지 못했을 엄마를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시큰거려 온다. 아이는 떠났지만 때가 되면 주인 없는 젖이 눈치 없이 흘러나와 가슴이 흥건히 젖어버리고 말았을 텐데. 몇 날 며칠은 세상에 있지도 않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와 방 안을 둘러봤을 텐데.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장면들이 되었다.
가슴에 묻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남겨진 이의 몫만큼 씩씩하게 살아간다. 서로에게 내색할 수 없는 슬픔이기에 조심스럽지만 그래서 더 서로에게 소중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요즘은 길을 걷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열 달을 꼬박 품어 세상에 내어놓기까지가 얼마나 고귀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 덕분이다. 엄마가 되는 일이 처음이라 매일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기운을 낼 수 있게 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슬픔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