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속도는 저마다 달라서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받은 위로

by Jessie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만난 건 코로나가 심해지고 있던 3월의 어느 날이었다.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워 산책 말고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때 우리 부부의 일과였다. 집돌이인 남편과는 달리 바깥 활동을 좋아하는 내가 소파에 늘어져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남편은 커피를 사들고 봄맞이 산책을 가자고 제안해왔다.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기고 느릿느릿 청바지를 주워 입었다. 남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선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자 금세 외출 준비가 끝이 났다.




서울과는 달리 나의 고향은 어디를 가든 여유로움과 초록이 넘친다. 모든 것들이 빠르고 화려하게 지나가는 도시의 삶을 살아온 이들은 아마 이곳을 무척이나 지루하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제로도 서울에서 나고자란 지인은 필요한 것들을 바로바로 살 수 있는 서울의 삶이 너무나 익숙해서 올리브영이나 다이소를 가려면 차를 타고 십여분을 나가야 하는 이곳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개를 젓곤 했다.

고개가 아릴 정도로 위를 올려다봐야 겨우 하늘 몇 조각이 보이는 서울과는 달리 이곳에는 시야를 가릴만한 건물도, 소란스러운 경적도 없다. 물론 이따금 시골 마을을 지날 때면 구수하게 풍겨오는 소똥 냄새나 산책을 할 때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들이 있긴 하지만 서울의 숨 막히는 삶에 비하면 그 정도의 불편은 눈감고도 넘어갈 만한 것들이다. 이 한적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것들을 스무 해동안 먹고 컸으니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던 나의 마음은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회귀본능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면 기어이 운전대를 잡게 만드는 카페가 있다. 주문을 하고 커피를 받기까지 다른 곳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지만 늘 일정한 온도로 우유를 덥혀 라테를 내려주는 사장님의 친절함과 커피에 대한 신념이 좋아서 남편과 내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장소이다. 사장님과 안부를 나누고 주문한 라테 두 잔을 기다리던 중 카페 한편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명이 떠올랐을 만큼 선생님은 키가 엄청나게 크셨다. 또 명작 속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선생님은 늘 다른 친구들 몰래 출판사에서 받은 학습지들을 챙겨두었다 말없이 건네주시곤 하셨으니 학창 시절 나에게는 유명의 키다리 아저씨이셨다. 선생님이 다른 일행분들과 함께이셔서 인사를 잠시 망설였지만 17년의 공백이 더 길어지기 전에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례를 무릅쓰고 다가갔다. 품에 안고 있던 아가와 나 모두에게 반가움을 건네시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데 잠시 뒤 선생님이 곁으로 와 아기 용돈이라며 주머니에 오만 원을 넣어주셨다.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아기를 위한 것이라며 나의 거절을 가뿐히 무마시키시고선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일대일 상담을 할 때 우리는 저마다의 가정 형편과 가고 싶은 대학 그리고 직업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생산직 노동자인 부모님과 맏이로서 학비 부담을 덜어 드려야 하는 책임과 함께 하늘을 마음껏 날아 여행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은 꿈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2절지의 대학 리스트를 크게 펼치시며 선생님이 형광펜으로 그어주신 몇몇 학교들 중에서 나는 관광으로 유명한 제주의 국립대를 알게 되었고 2년 후에는 그곳에서 꿈에 그리던 캠퍼스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시간이 늘 넘쳐흘러서 40분이나 걸리는 완행 버스를 타고서도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지 방학만 되면 참지 못하고 학교로 달려가곤 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차 학창 시절은 까마득해져 가고 있었다. 명절이면 전하던 안부도 일 년에 한 번 그리고 점차 뜸해지더니 10년 동안 한 번도 여쭙지 못하고 어느덧 서른다섯의 아기 엄마가 되어버렸다. 학창 시절에는 늘 선생님께 학습지를 받아오며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정작 서른다섯이 된 나는 훌륭하지도 않고 그 무엇도 되지 못한 모습이라 나는 그제야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며 귀가 붉어지고 말았다.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이따금 들여다보다가도 무엇 하나 되지 못한 나 자신이 초라해서 연락 한 통도 드리지 못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스튜어디스도 되지 못했고, 호주에서도 정착하지 못했고 서른 언저리에 서울살이를 시작해 하루하루 직장생활을 하다 어느새 엄마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그간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꿈을 이룬 사람이고 싶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되지 못해서 용기가 없어서 찾아뵙지 못했다는 우둔한 고백에 선생님은 나와 아기를 꼭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누구나 자신의 속도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가 빠르다면 너는 단지 느릴 뿐인 것이지. 속도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거란다”




아기를 가운데 두고 선생님과 나눈 잠깐의 포옹이었지만 분명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꼈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했던 나였지만 선생님의 담당 과목이던 수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열 번씩 다시 펼쳐보았던 지난 시간들도 찰나처럼 스쳐갔다. 늘 열심히였지만 남들보다 유독 느린 나에게 선생님은 참 많은 마음을 쏟으셨다. 무뚝뚝하셨지만 큰 손에 쥐고 있던 주전부리를 건네시기도 하고 어깨를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 걸음 뒤에서 누구보다 내가 잘되길 바라셨을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철없는 대학생의 모습으로 찾아뵐 때면 아빠처럼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선생님은 10년이 훌쩍 지나 엄마가 된 나 역시도 그 시절 그때처럼 말없이 안아주실 뿐이었다. 지금의 내가 누구만큼이나 반짝거리는 모습은 아니지만 결코 느린 나의 걸음이 부족하거나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만 같았다.


어떤 시절에는 분명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웠던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여전히 그 믿음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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