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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pr 21. 2024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

마음의 허기까지 채워주는 음식에 대하여

@ 서울살이의 힘이 되어준 순대국밥


 남편과 나는 정말이지 다른 종류의 인간이지만 그런 우리를 부부로 이어준 음식이 있다. 뚝배기에 담겨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뽀얀 국물. 아삭아삭한 김치 그리고  익은 깍두기와 너무나도 궁합이  맞는 순대국밥  그릇. 호주에서 뜨거웠던 연애를 이어가던  비자 문제로 그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며 우리는 짧은 롱디 생활을 했다. 6년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나는 현실이 얼마나 매섭고 차가운지를 알아차릴  있었다. 서울대 입구역에서도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려 15분을 걸어가야했던 그의 고시원을 마주했던 , 자신의 형편을 털어놓으며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그와  사이에는 순대국밥이 놓여 있었다. 차마 헤어지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나였기에 눈물과 함께 고개를 저었고  배고픈 인연은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되는 보증금으로 조금이라도 해가 드는 방을 찾겠다며 신림역 일대를 헤매고 다니던 날도, 처음 들어갔던 회사에서 임금체불을 당하고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던 날도 메뉴는 순대국밥이었다. 돌이켜보면 삶의 굴곡이 있던 순간들에는  우리 사이에는 순대국밥이 놓여 있었다. 배고픈 날도, 서글픈 날도, 엄마가 보고 싶은 날도 그리고 모두  지겨워져서 놓아버리고 싶은 날도 결국에는 순대국밥을 욱여 넣으며 허기를 채우고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을 닦으며 집으로 향했다. 서울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곳을 생각하면 순대국밥이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한다.



 어쨌든,  국밥  그릇에 소주  병을 놓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까지 더하면 그날도 어찌어찌  굴러간 하루인 셈이었다. 울퉁불퉁한 삶의 굴곡들을 겪으며 200 원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우리는 자주 국밥집으로 향했다. 원룸에서 다시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1.5 그리고   개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해나가는 동안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근처의 맛있는 순대국밥집을 찾아 나서는 일이었다. 신림역에  때는 도림천 근처의 깍두기가 맛있었던 식당에서 순대국밥을 먹었고 상봉역으로 이사를 하면서는 아주 오래된 노란 간판의 낡은 국밥집에서 자주 끼니를 때웠다. 주머니 형편이 조금 나아졌을 때에도 이상하리만큼 순대국밥집을 찾았던 것은 배고팠던 시절, 국밥  그릇의 사치 말고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소주  병을 나눠마시며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서로를 다독거리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왼) 신림동 1.5룸 시절 / 오) 물오뎅 (출처: 지식백과, 게티이미지)



 우리 부부의 소울푸드가 순대국밥이라면 나와 동생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다. 내가 그 음식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남편이 무심하게 던진 말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그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이제서야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결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나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 조금 더 확실해졌다.

 언젠가 친정식구들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가던 길이었다. 주말이라 길게 늘어선 차들은 쉬이 줄어들지 않았다.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코 앞이었지만 멈춰선 차들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가 있을 때만 그곳으로의 진입이 허용되었다. 기다림이 지루해질 무렵, 동생은 창 밖을 바라보다 갑자기 내려야겠다며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그렇게 동생의 걸음이 닿은 곳은 물오뎅*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의 작은 가판대. 주차장 입구를 향해 늘어선 줄이 차츰 줄어드는 동안 물오뎅 3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동생은 종이컵에 국물까지 야무지게 담아 지난밤에 들이부었던 소주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차에 다시 올라탔다. 역시 오뎅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말과 함께 행복한 웃음을 지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오뎅 좋아하는 거 너랑 닮았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을 남편은 무심하게 일깨워준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오면 가장 기다려지는 건 붕어빵도 있고 포장마차의 새빨간 떡볶이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긴 나무꼬치에 통통하게 매달려 연기를 폴폴 뿜어내는 물오뎅이었다. 신대방역에서 서울살이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역 앞에 길게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기본 안주로 내어주는 물오뎅을 순식간에 들이키고 씩씩하게 국물을 리필하는 것이 바로 나였고, 선릉역으로 출근하던 시절에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메신저로 “오뎅?”이라는 은밀한 암호를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았던 과거가 있었다. 대상포진으로 골골거리며 작은 원룸 바닥에 누워있을 때도 누렇게 변색된 벽지를 보며 물오뎅을 떠올리는 지독한 인간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남편의 한 마디에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동생과 내가 물오뎅을 좋아하는 모습을 통해 아주 오래된 기억을 슬그머니 떠올린 것이었다.



 작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터라 우리 남매에게는 주전부리라고 할 만한 것들의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게는 시장에 다녀오는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호떡, 핫도그, 순대, 떡볶이 같은 것들이 우리의 간식이 되어주었다. 부모님은 농공단지의 작은 회사를 다니시는 맞벌이 부부였다. 대게는 아침과 저녁을 함께 먹었고 저녁을 먹고 나면 아홉 시 뉴스를 보며 제철과일을 먹는 한결같은 일상을 보냈다.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도 한 달에 두어 번은 아빠가 특별한 야식을 만들어주곤 했는데 그중 가장 익숙하고 기억에 남는 것이 물오뎅인 것을 보면 우리가 자주 그 음식을 먹으며 겨울을 났던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한 팩에 5천 원이 안 되는 넓적한 오뎅 한 봉지 그리고 나무 꼬챙이가 아빠가 들고 온 봉지에 들어있던 날이면 으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뎅을 꼬치에 끼우곤 했다. 커다란 무와 대파는 밭에서 공수하면 되는 터라 오뎅은 저렴하고도 푸짐한 간식인 셈이었다. 누르스름한 낡은 솥에 커다랗게 썬 무와 넓적한 다시마를 몇 장 빠트리고 충분히 국물이 우러나면 꼬치에 끼워둔 오뎅을 넣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감칠맛이 나도록 간을 맞추는 것과 고춧가루가 송송 뿌려진 간장을 만드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지만 이 음식만큼은 큰 수고로움 없이 모두가 배부를 수 있었다. 늘 네 식구가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기에 무언가를 함께 먹는 것이 크게 특별하진 않았지만 아빠가 만든 야식을 먹는 시간은 다른 시간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주방을 내어준 엄마와 거실에 앉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누군가의 하루를 들으며 어쭙잖은 훈수를 두기도 했으며 어떤 날엔 사는 게 쉽진 않지만 가족이 있어서 힘이 된다는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말을 직접 듣게 되는 날도 있었다. 무뚝뚝한 아빠가 건네는 그런 말과 음식들이 따뜻하게 남았던 이유에서였는지 우리는 자라나면서 아빠가 준 상처들을 그 음식들로 위안 삼으며 아빠를 용서했던 것 같다. 진심은 늘 따뜻한 오뎅을 먹던 그 날과 같을테니까. 결국에는 그것이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꽤 따뜻한 장면으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자꾸만 찾게 되는 소울푸드가 되었다.






@ 신대방역 원룸의 오래된 천장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을 먹을 때마다 외로움인지 허기인지 모를 것들이 어느새 채워진 기억들은 유난히 지치는 날이면 어김없이  음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배고픔과 함께 감정의 허기까지 채워주는 음식. 겨울이 지나고나니 문득  음식이 그리워지는  이상한 아이러니가 아닐  없다. 아이를 낳고 포장마차는커녕 분식점 의자에 앉아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들이지만  겨울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포장마차에 들러 오뎅꼬치를 하나씩 들고 추억을 나누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야, 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소울 푸드를 떠올리며 다가올 계절들을 조금  기쁘게 기다려보는 바이다.




* ‘오뎅’보다는 ‘어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정확하나, 가족끼리 쓰던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위 글에서는 ‘오뎅’으로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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