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몽파르나스 - 바욘 - 생장피드포르
프랑스 파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여행지이지만 나에게는 산티아고에 가기 위해 닿아야만 하는 그 어떤 도시에 불과했다. 사실 비어있는 여행자의 주머니는 프랑스의 비싼 물가가 지나치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과 저녁을 준다는 한인민박에 머물며 파리의 소박한 거리를 걸었다. 5월이지만 꽤나 쌀쌀한 날씨에 코끝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날, c가 '혹시 모르니까..' 라며 서둘러 벗어준 후리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순례길을 채 걷기도 전에 동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4일동안 가장 아쉬운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오르쉐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들리지 못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여행자의 주머니는 언제나 가볍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선택지와도 같다. 아쉬운 마음에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 앉아 바게트 빵 한 조각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광장에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 연인과 함께라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빵 한 조각을 야무지게 삼키는 데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순례길을 걸으러 온 이 순간까지도 외로움을 기여코 찾아내는 나의 신경계가 정말이지 징그러울만큼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인민박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6명이 오손도손 모여서 잠을 자야하는 공간에는 밤이 되자 모두가 모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파리에 왔다는 나에게 10개의 눈빛이 모였다. 그 눈빛의 대부분은 호기심을 안고 있었고 이미 그 길을 걷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에 왔다는 윗 침대의 언니는 나를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 추운 날씨를 채 견디지 못하고 콧물을 훌쩍이던 나에게 언니가 감기약을 건내주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익숙한 한국어를 들으며 녹아내려서였는지 나는 언니가 건내준 약을 쥐고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고 아주 오랫만에 기면증의 일부인 내 지독한 습관 하나를 모두에게 보여주고야 말았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부터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윗 침대 언니에게 복대를 억지로 받아들고서야 모두들 나를 안심하고 재워주었다.
다음 날 새벽,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떠날 채비를 하던 중에 윗 침대 언니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등장했다.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아침 10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기 시작한 언니는 사실 사전 정보도 정확히 확보하지 못한채로 정말 가볍게(?) 그 여정에 들어섰단다. 4월이지만 이상 기후 현상으로 여전히 눈이 쌓여있던 피레네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고 물과 음식 그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은 언니는 홀로 외롭고 두려운 산행을 시작한 것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이 트는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한다) 배고픔과 허기에 어지럼증이 몰려오자 가던 길을 멈추고 앉아 배낭을 샅샅이 뒤졌더니 덩그러니 커피믹스 하나가 등장했다. 뜨거운 물조차 없었던 언니는 길 가에 있는 눈과 커피믹스를 손으로 주물러서 먹었다고 한다.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덕분에 나는 가방 가득 초코바와 물을 챙겨서 갈 수 있었다.)
불어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나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서 테베제(KTX와 비슷한 열차)를 기다렸다. 쌀쌀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창문 너머 이른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파리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제 3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디서든 여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텐데 하는 치기어린 생각을 해본다. 열차를 놓칠새라 한참동안 전광판 주변을 서성이다가 익숙한 번호가 불리는 순간 열차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테베제를 타기 전, 한 동양인 여자가 같은 피부색의 '동성'인 내가 반가웠는지 눈으로 나의 행보를 쫓았다. 생장 피드포르에서 바욘역까지는 약 3시간. 역에서 내리자마자 아까 지나쳤던 동양인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한국분이시죠?
아까 뵙고 너무 반가웠어서요.. 카미노 가는거 맞으시죠? 같이가요^^"
바욘에서 생장행 열차는 2시간쯤 후에 있어서 우린 함께 바욘 역 밖으로 나가서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전날 마트에서 샀던 바게트를 그리고 그 친구는 샌드위치를 꺼내서 서로 나눠먹으며 간단한 소개를 마쳤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J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씩씩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나보다 음식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
점심을 먹고 가볍게 바욘이라는 작은 마을을 걸었다.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꽤 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머물렀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냈고 사람들도 답례를 보낸다. 그 짧은 인사에 갑자기 이 작은 도시의 인상이 좋아지고 만다. 어느 작은 카페 앞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가방을 베고 누웠다.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다 문득 호주를 떠나기 전 알게된 친구가 떠올랐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자주 찾아오던 단골손님, 팸 할머니.
할머니는 일주일에 5번, 똑같은 사이즈와 똑같은 맛의 아이스크림을 매번 사가셨다. 초콜렛 칩 쿠키도우3, 쿠키 앤 크림3, 스트로베리 치즈케이크1, 녹차 1. 아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할머니~ 아이스크림 진짜 좋아하시나봐요! 오실 때마다 8만원치 아이스크림을 사가시고 말이예요"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말씀하셨다.
"내 딸이 많이 아프거든,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만 하는 그런 이상한 병이 있어. 사실 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지도 않고 한 두스푼만 떠먹고는 매번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데도 매일 사달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18살 때 갑자기 시작된 이 증상은 뚜렷한 병명이 없었다. 단지 할머니가 건내준 쪽지에는 거식증과 폭식증 등의 여러가지 병명이 뒤섞여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10년 동안을 방 안에서 지내며 학교도 가지 않고 빛이 들어오지 않게 창문을 막아두고 오롯이 할머니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견뎌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오시기 전이면 매일 아이스크림 뚜껑 위에 작은 메세지들을 써서 할머니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간절한 것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디즈니 월드에 갈 수 있기 까지의 나의 노력들, 노래 가사 속의 어떤 영감까지.
할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할머니의 가족을 사랑했고 그 가족들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할머니의 아들, 할머니의 딸 그들에게 어쩌면 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호주를 떠나기 이틀 전, 할머니의 딸은 갑작스럽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에게 영향을 주던 혹은 내가 기운을 나누던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표현은 어른이 되고선 6년 만에 다시 입 밖으로 읊어보는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묻고 싶었다.
왜 헤어짐이라는 큰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거냐고.
배낭은 자꾸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정각을 알리는 기차역의 종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기차로 향했다. Saint jean pied de port 로 향한다는 나의 발음은 여전히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나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몸채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를 향해 걷고 있었으니까.
다들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이 길을 걷는다. 그 이유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걷는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 가까워지고 함께 눈물 흘리곤 한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기차 안에서 나는 한참이나 내 볼을 꼬집었더랬다.
이 것이 꿈일까하고.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