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먼저 닳아버린 이를 곁에서 바라보는 일
남편은 결혼을 한 이래로 한결같이 지쳐있다. 호주에서 나와 연애를 하던 6개월을 제외하고는 늘 아버지 대신 짊어진 가장의 역할에 치여서, 먹고사는 일에 지쳐서, 나와 아들을 먹여 살리느라 온전히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성격은 또 어찌나 우직한지 서른한 살에 입사한 회사에서 마흔이 되도록 일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이라는 것은 자고로 옮겨 다니며 본인의 가치를 새롭게 적립하는 법인데 인턴생활부터 스토어 총괄을 맡은 지금까지 그는 한 회사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독립적인 성격임에도 의외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 그는 두려움이 많다. 한국과 베트남, 장거리 결혼 생활 2년 중 그에게 혼자 여행을 다녀오라고 얼마 되진 않지만 1년 간 모아둔 적금을 건네며 권유를 했었지만, 그는 결국 아무 데도 다녀오지 못하고 집에서 빨간 날들을 하염없이 흘려보냈고 불현듯 마흔이 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은 아빠의 술을 제외하고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부족함이 없었고 가족들은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항상 아침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여느 집이나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가끔 들려주는 그의 어린 시절은 나와는 너무도 달라서 어떤 공감과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어려울 때가 많았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그는 그 무게까지도 오롯이 감당하며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책임감 없는 시아버지를 책망하다가도 얼굴이 굳어지는 남편을 언젠가부터 알아차리고서는 이제 말을 아끼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사랑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늘 지쳐있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 유난히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모습은 프로젝트로 인한 피곤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곁에서 오래 지켜보며 그의 피로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유년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취미도,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어쩌면 그걸 알아차릴 시간조차 없이 살아온 무색무취의 남자. 남들이 보기에는 선명하고, 원하는 바가 분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늘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했다. 호주에서 우리가 누리던 시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의 사랑이 나에게 주어진 이유에서였다. 끊임없이 투쟁하고 반기를 들고 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오랫동안 지쳐있던 사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 얼마 되지 않는 마음을 아이에게 나눠주고 나면 나에게는 아주 조금의 마음이 온다. 작은 마음을 받아 들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유난히 지친 한 사람이 보인다.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숱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기력함이 밀려오는 그런 하루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