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떠나면서 했던 생각들
0. 무서워서 평일에 휴가 쓰겠나... 분명히 일주일 정도 휴일기간과 휴가를 끼워서 자리를 비울땐 사전 서류작업과 급한 건을 다 단도리를 해놓는데 꼭 휴가 쓸때마다 일이 터지더라. 이번 휴가는 좀 심각하긴 했다. 휴가 시작을 9시에 했다 치면 한국을 비운지 5시간도 안됬는데 전화와 문자와 슬랙이 파트너사/고객/유관팀으로부터 돌아가면서 오고 (신기록 경신)
비행기 환승해야해서 환승공항에 잠깐 자동로밍이 잡혔는데 캐치콜 문자랑 알림이 무섭게도 오더라. 다행히 회사 노트북을 가지고 왔고 같이 일해주시는 분들이 한국에서 자리를 지켜주시는 덕에 잘 해결을 했는데 이런 삶을 살다 보니 주말과 공휴일이 귀해 진다. 평일 휴가는 나만쉬니까 주위 사람들이 다 연락을 하는데 주말이랑 공휴일은 그사람들도 쉬니까.
1. 언젠가부터 새벽의 공항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공간이 되었다. 해외에도 국내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의 지점, 새벽 3시 정도에 인구밀도 적은 인천공항은 최적의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다. 새벽 비행기 탑승을 위해 리무진에서 내려서 수트케이스를 일정한 속도로 끌고가는 그 소음을 들으며 걸어가는 그 시간은 평화 그 자체다. 주위에선 왜이렇게 새벽에 밤을 새는 걸 좋아하냐고 물어보지만, 당연한거 아닌가. 속썩이는 문제로 갑자기 연락하는 가족도 없고, 불시에 대응해야하는 직업상 문제도 안터지고 (그다음날 아침에 터질 수 있지만), 길가다가 갑자기 시비를 거는 이상한 노년세대도 없다. 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쉴수 있는 24시간 중의 시간대. 조용히 집중해서 밀린 일도 할수 있고, 차도 마실수 있고,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2.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했던가. 사람들은 내게 새벽 3시무렵까지 깨어있을 이유가 뭐냐고 묻지만 한달전부터 이번 휴가를 준비하고 다 밑작업해놨는데도 해외 경유 공항에서 전화를 받는데 나한텐 지금 공간이 문제가 아니다. 나에겐 "안전한 시간"이 그때밖에 없는 거다. 작년 가을엔 샌디애고에 갔는데, 미국 시간으로 데이타임은 한국의 6시 이후 저녁~새벽이기 때문에 아무도 연락을 안해서 풀로 휴가 데이타임을 즐길수 있어서 참 좋더라. 낮에 휴가 일정을 보내고 숙소에 들어가서 저녁에 한국이랑 일을 해주면 되니까.
3. 이렇듯 모처럼 만난 안전한 시간대에 마음놓고 집중하다보면 주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원체가 바운더리가 높은 사람이라 그런가. 공항에서 할거 하면서 집중하고 있을때 옆에서 손을 흔들거나 나한테 뭘 물어보는 걸 별로 안좋아하고. 하기야 직장에서도 집중하고 있을 때 팀원들이나 팀장님이나 누가 부르면 못듣거나 가까이서 불러야 비로소 깜짝 놀랄때도 많은데 당연하지...
4. 최근들어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악물고 악착같이 살아왔지만 어찌되었든 이제 서른 살에 이정도밖에 안된다고 한계를 인정하자 이상하게 더 이룰 수 있는 것들은 많아졌다.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타개해나가는 까닭이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남들 이 다 못한 일을 나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들이 괜히 못해서 그게 안되고 있는게 아니었다. 나도 똑같이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무언가를 해낼수 있는 사람이었고, 장단점이 있었고, 잠이 부족하면 예민해지고 실수가 늘고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도 어찌되었든 나도 사람이니 자기관리가 끔찍하게 필요하다는 생각. 나도 어찌 되었든 남과 같은 사람이니 잘되고 싶으면 내 스스로가 나를 잘 먹이고, 식단관리를 하고, 곁에 있어 주는 배울점이 있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겸허하게 돌아보며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받아들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