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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Feb 02. 2019

인생은 벗어나기 삶이다.

삶은 늘 앞을 향해 전진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티비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허름한 집이었던 기억이 난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은 빨간 불이 켜지는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밤에 화장실을 가야 할 때면 곤히 잠든 언니를 흔들어깨우다 못해 반 고문을 시켜 강제로 끌고 나오다 시피해야만 갈 정도였다. 한 번은 같은 반 남자아이가 우연히 우리 집을 보게 되었고 허름한 시멘트 벽에 허술한 나무문 두 개가(하나는 바로 그 화장실 문) 있는 우리 집을 보고  "너네 집은 화장실이냐?"하고 놀리는 탓에 머리카락 쥐어뜯고 싸울 뻔했다. 그런 나에게 우리 집을 공개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정말이지 깨끗한 집에서 깨끗하게 살고 싶었다.


 사람들이 뭐라든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깃들어있던, 소중한 나의 푸세식 화장실 집은 아홉 살이 되던 해 기억 저 멀리 사라졌다. 바야흐로 온 동네가 재건축 열풍에 휩싸였고 그렇게 우리 집도 당시 최고 유행하던 초미니 빨간 벽돌 빌라로 격상했다. 고작해야 10평짜리 집에 방보다 큰 화장실과 창고까지 야무지게 넣느라 큰 방과 작은 방은 아주 귀여워 죽는다. 작아도 너무 작은 방에서 언니와 몸을 부대끼며 나란히 함께 자거나 그보다 살짝궁 '큰' 방에서 할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티비를 보며 잠드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 집이 지금까지 30해를 맞이하며 여전히 아빠와 함께 건재하며 명절마다 나를 맞아주고 있다. 그리고 늘 생각한다. 기왕이면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스무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늘 옮겨지는 직장과 함께 다양한 주거환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 일하던 곳은 내가 일하는 레포츠 센터 건물의 기숙사. 작은 오피스텔에서 여자 직원 3명과 함께 침대를 나란히 붙여서 쓴 덕에 평생 몰랐던 내 잠버릇을 발견했다.

 코 골기. 이 갈기. 남의 침대에 올라가기.(심지어 그 침대는 내 침대보다 한 뼘이나 높았다.)

 놀라웠다. 무의식 중에 이 쓰리 스텝을 매일매일 구사한다는 나의 능력이 말이다. 늘 자다가 봉변을 당한다는 최고참 언니. 침대를 침략당하는 건 애교라며 내 코골이 때문에 언니는 자다 말고 깨서 내 코를 비틀었다가 베개로 내 얼굴을 덮어도 버렸다가 나를 흔들어 깨워서 애원도 해보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했다고 한다.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코골이 수술 병원을 권해주기도.


 그러다 12월 24일이 되어 처음으로 그 공간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다들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휴가 중이어서 숙소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날 밤. 크리스마스이브날 텅 빈 숙소 방에 혼자 남은 나는 좋아 죽을 뻔했다. 늘 누군가와 함께 쓰던 생활공간에 처음으로 혼자 남아있다는 것. 기쁨이 폭발할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한 시간도 넘게 실컷 구경했다. 마음 편히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싸이월드도 실컷 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셀카놀이에 푹 빠졌다가 겨우 자정이 되어서야 잠들기 시작했었다. 그날만은 누군가 자는 나의 코를 비틀며 깨우지도 않았고 다음날 잠에서 깨면서도 혹여나 밤사이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까 눈치 볼 일도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자기만의 공간이 주는 행복감을. 이렇게 나 혼자 쓰는 공간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부터 혼자 있는 공간을 꿈꿨다.

 '그래. 깨끗하고 넓은, 그리고 절대로 내 공간이 따로 있는 집에서 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밤마다 옆 침대 난입 소동을 이어가던 일상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2년 주기로 계속 거처를 옮기며 정말 다양한 환경을 경험했고 또 그 환경만큼이나 다양한 추억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였다. 가장 전성기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때는 2년 동안 일곱 번의 이사를 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사라면 나름 프로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도 돌아다녀 마음속 깊이 또 하나의 간절한 꿈이 생겼다.

 '반드시. 절대로. 무조건!

  깨끗하고 넓으며 독립된 내 공간이 있는 집에서 한동안은 제발 정착하고 싶다.'라고.


 그렇게 역마살 낀 듯 정신 못 차리게 돌아다니던 시절이 끝나고 발병 시기와 거의 동시에 현재 위치로 이동되어져 왔다. 내 의지라고는 1도 없이 상황 상. 이곳에서 벌써 만 4년을 꽉 채웠다.

 참 신기한 건 분명 스물다섯 살 나는 캐리어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에 올라왔었는데 언제 이렇게 내 짐들이 산더미같이 불었나 하는 것이다. 심지어 피난민같이 짐보따리를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버리는 게 인테리어의 비결일 정도인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하는 고민은 무엇을 버릴까이다. 돈을 잘 벌어 덜컥 덜컥 잘 지르는 스타일도 아니고 물건 사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나인데 어디서 온 소유물들인지. 처음엔 혼자 캐리어로 옮기던 살림이었건만 어느새 택시로, 콜밴으로, 용달로, 트럭으로, 전문 이사업체로 자꾸 조금씩 규모가 커진다. 이러다가는 몇 년 후면 내 집도 생길 판이다. 그래 주면 너무 감사하다만.  


 늘어난 건 살림만은 아니다. 지금의 공간은 늘 꿈꾸던 나만의 공간이 있음은 물론 신도시의 아파트답게 깨끗하고 편리한 것은 기본이려니와 상쾌한 숲길도 있고 아름다운 공원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언덕에 위치한 덕에 저녁이면 하늘을 가득 메우는 아름다운 석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것도 큰 혜택이다.

 더욱이 이곳은 나에게 치유와 동시에 나의 길도 찾고 그 길을 잘 갈 수 있게 환경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지지해 주는 곳이다. 서울보다 저렴한 집세가 그러하고 너무나도 조용하면서도 쾌적한 동네환경이 그러하고 늘 각각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었는데 어느새 일부만이라도 함께 모여 나의 소중한 울타리가 되어 준 점이 그러하다. 그런 환경이 체력도 집중력도 약한 내가 글을 쓰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 또 하나의 꿈을 더 보탠다면, 앞으로 건강해진 후에는 좀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바다도 있으면 정말 좋겠다.


 삶은 항상 앞을 향해 전진한다. 내가 멈추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듯 인생의 삶도 늘 과거를 조금씩 벗어나는 일이다. 몸은 비록 병에 갇혀 있어도 정신은 갈수록 자유로워지니(나는 더 단단해져 가고 있으므로) 끝까지 가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게 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서라도 조금씩 조금씩 늘 앞을 향해 가보고 싶다. 단계 단계마다 나를 위해 준비된 것들을 그 순간순간 반갑게 맞고 기쁘게 누리며 가다 보면 그 끝에 이를 날이 있으리라.

 오늘도 눈을 감고 다가올 그 날들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그 날의 내가 느끼는 평온함을 상상해보며 마음속에 행복한 기운이 깊고 깊이 박히도록. 가득하고 가득해서 넘쳐 오르도록 가만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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