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산, 공주, 세종. 각지에 흩어져있던 우리는 봄바람이 따뜻한 어느 기분 좋은 날, 여수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잠깐의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메뉴를 정한 후 내가 가방에서 오늘의 히트템을 꺼냈다. 내가 사비로 특별히 주문 제작해 온 단체티였다. 앞면에는 '우정여행 중'이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각자의 애칭과 함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세상 남사스러운 티셔츠였다. 서른 중반 넘은 여자들이 사람 많은 관광지에서 넷이 몰려다니며 이 티셔츠를 입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친구들 모두가 손발이 오글거려 호흡곤란 증상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다들 이미 약속한 바였다. 각각의 애칭도 서로 간에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미리 심도 있는 의논을 거쳐 결정된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난 생애 첫 우정여행을 간지 풍기게 준비했다.
가진 게 없다고 징징거리면서도 딱 하나 늘 감사했던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징그럽게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친구 녀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과의 인연은 평균 25년 정도다.
오래되었다 뿐 사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던 사이였다. 서로 명절에 얼굴을 보는 정도의 사이였고 어색하진 않지만 만나서 딱히 재미있는 일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 공기같이 익숙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빈약한 인간관계가 아킬레스건인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친구들 중 가장 무뚝뚝한 K양에겐 특별히 고마운 일이 하나 더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유난히 활동적이었던(활발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주변의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남자아이들을 따라 담벼락을 타고 놀던 여자아이라 특이하게 여긴 존재였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우연히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된 그녀와 나는 각별히 친해지게 되었다. 집에 갈 때면 늘 같이 버스를 타곤 했는데 버스 운전기사였던 그녀의 아버지 버스를 자주 타게 된 덕에 교통비 면제의 혜택을 꽤나 자주 받았다. 그리고 하나 더. 당시 급식비를 내지 못하던 나는 늘 저녁 급식시간이면 멀리 있는 K양의 반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그녀의 급식을 나누어먹었다. 무려 1년을 말이다.
내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스킨십 애교 대마왕 P양은 아주 귀여운 말로 나를 웃겨줬다.
"거짓말~. 넌 가슴도 작잖아."
유방암은 가슴 큰 여자들이 걸린다더라며 어떻게 너 주제에 유방암에 걸릴 수 있냐는 듯한 그녀. 어디서 그런 무식한 말을 들었는지 사뭇 궁금하게 하는 P양은 사랑스러운 B형 여자인지라 내가 이해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돈 좀 벌고 있는 유능한 웹퍼블리셔라 무식하진 않으나 가끔 엉뚱한 매력이 철철 넘친다.
우리 중 유일하게 결혼 한 S양. 21살 때, 동갑내기들 카페에서 친해진 정연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고 태어나 처음으로 충북 보은을 갔다. 평생 도시에서만 살던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시골은 버스가 '기다리면 오는' 편리한 곳이 아니란 걸. 한번 놓치면 그날 그 버스를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아무 데나 내리면 거기서 구조요청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결국 정연이는 그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우리를 주우러 길을 나서야 했다. 그 여정에 함께 한 희생양이 바로 착한 순둥이 S양. 얼마 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젠 자기도 많이 안 착해졌다고. 사실 정말 그런 것 같다.
전이 판정이 떨어지고 항암치료가 다시 시작된 12월부터는 기나긴 겨울이었다. 춥고 어지러운 겨울 아침이 매일매일 반갑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을 보내며 내내 생각했다. 밖에 나가서 활동하게 되면 무엇을 할까 하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활동들이라고 청승맞은 생각들을 하며.
그러다 문득 사람들과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하나 몰래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기억 속 곳곳을 장식해준 오랜 친구들을 위해 무엇을 남겨주면 좋을까. 그러다 못된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각자 잘 살고 있으니 내가 없어도 녀석들은 그렇게 잘 살 것 같은 생각에 혼자 왠지 억울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심했다. 녀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기로. 가끔 나를 떠올리면 함께 한 즐거운 기억들이 많이 생각나 가슴 사무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게 해 주리라.
우린 그 긴 시간 동안 사실 단 한 번도 다 함께 간 여행이 없었다. 먼저 기획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도 항상 바쁜 녀석들인걸 알기에 다들 머뭇거릴 거라며 큰 기대를 걸지 않고 꺼낸 말이었는데 상황은 내 예상과 달랐다.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들 난리법석들이 났다. 반딧불을 보고 싶다는 P양,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다는 S양, 맛집 탐방을 하겠다는 K양. 그 와중에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꼭 함께 하고 싶다며 부끄러운 단체티 착용을 강요한 나. 평소 같았으면 너나 입으라고 한소리 들었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들 나를 위해 남사스러운 레터링이 들어간 단체티셔츠에 경악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줬다.
그렇게 서울과 충청, 그리고 부산까지 골고루 흩어져있던 친구들과 한 지점에서 만나 짧지만 강렬한 첫 여행을 가게 되었고 그 모든 일정을 내가 직접 짜느라 그만 눈을 감아도 세상이 빙빙 도는 빙빙 세상에 잠시 입성하기도 했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정도 작은 희생은 감수할만했다.
그 짧은 여행을 치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말하길 잘했다는 것. 내 사소한 말 한마디에 대군이 움직여주다니. 그 바람이 현실 가운데 척척 이루어지다니. 아마도 내가 처한 상황이 주변인들을 알게 모르게 압박했으리라. 그리고 그 덕에 나는 큰 것을 얻었다.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추억을 쌓을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시간 동안 더 많은 추억을 남겨보겠노라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해 가을 우린 다시 두 번째 여행을 함께 했다. 그 사이 내 건강은 훨씬 더 좋아져 있었고 활동량도 많이 늘어나 있었다.
친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그렇게 오히려 나에게 그들이 보내준 관심과 배려 덕에 용기가 되어 돌아와 주었다. 물론 그녀들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60, 70, 80이 되어서도 우리에게 시간이 허락한다면 함께 추억을 많이 만들 계획이다. 할매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동네 미용실표 뽀글이 파마도 넷이서 꼭 해보고 싶다. 카페에 백발머리 친구들과 둘러앉아 쪼글쪼글한 입술로 핫초코를 마시며 수다도 떨어봐야지. 그리고 배낭 하나씩 둘러매고 유럽여행도 가볼 테다. 그때도 단체티 입자고 졸라볼 계획이다. 시답지 않은 소리들이지만 오래오래 살고 싶은 의욕이 자꾸자꾸 불타오르게 하는 작은 내 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