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문래동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운명을 만나다

by 직딩제스

2016년 5월 5일

문래동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날은 문래동 사무실 개업식 겸 루프탑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아는 후배와 함께 동업을 시작했다. 당시 다니던 회사가 여의도라 퇴근하고 바로 올 수 있는 여의도와 가까운 문래동에 사무실을 차렸고 문래동 창작촌에 위치한 아주 낡디 낡은 건물 3층에 책상과 의자만 갖다 놓고 일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 시대를 앞서 간 사업 분야였다. 후배와 나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당시는 유튜브 초창기여서 사람들이 영상보다는 여전히 사진을 찍기를 더 많이 한 던 때였다. 나는 그때 앞으로 영상 시대가 올 것이라고 판단을 했고 영상 촬영, 편집, 제작을 하는 동시에 사진 사업을 병행하는 사업 구조였다. 회사명은 더하다컬쳐스. 문화 사업까지 확대하려는 야심 찬 꿈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다.


여의도에서 퇴근하면 문래동으로 출근하고 주말에는 문래동으로 출퇴근하는 이중생활을 한동안 했다. 회사일 외에 처음으로 수익을 내려는 목적으로 도전한 사업이라 나름 포부도 크고 열정도 뜨거웠다. 회사에는 비밀로 했지만 무료하고 막막한 회사 생활에 지쳐있을 때 삶의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물론 처음해 보는 사업이고 동업이 늘 그렇듯이 결국엔 잘 안 되긴 했지만 내 명의로 사업자등록증을 내 본 첫 경험이기에 나름 의미가 큰 도전이었다.


사무실을 차린 지는 두 달쯤 되었을까. 그때까지 우리는 이렇다 할 개업식은 하지 않았다. 그냥 회의하고 일하는 작업 공간처럼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손님을 모시기에는 건물이 너무 낡고 화장실이 노후해서 외부 장소에서 개업식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사라진 문래동 치포리라는 카페인데 그곳에 옥상이 있었다. 마침 루프탑 파티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그 장소에서 5월 5일 개업식 겸해서 루프탑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멤버는 총 4명이었는데 지인들을 초대하는 방식으로 루프탑 파티를 열기로 했다.




5월 5일 문래동은 맑았다.

거리엔 포근한 봄기운이 감돌고 낮에는 더워서 반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다.

나는 오전부터 분주하게 카페 치포리에서 파티 준비를 했다. 카페는 2층이었고 옥상은 당일 우리가 대여해서 쓰기로 했다. 카페에서 술과 다과를 주문했고 간단한 술과 안주는 개인적으로 더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루프탑에 포틀락 파티였던 것이다. 파티는 늦은 오후 아마 3~4시쯤 시작했던 것 같다. 지인들이 하나 둘 모이고 대부분의 참석자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나의 지인 또는 지인의 지인. 모두 모이자 열댓 명 정도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눈에 띄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몸에 붙는 하얀색 보라색 원피스에 긴 생머리를 하고 머리 끝에 초록색 브리지를 하고 있었다. 봄기운과 무척 잘 어울리는 색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페이스북에 여행 관련 컨텐츠를 올리는 페이지를 각각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인스타그램보다 페이스북을 많이 이용했었고 카드뉴스 형태로 페이지에 여행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친한 동생 둘과 함께 여행 페이지를 운영했고 그 동생 지인이 기차 여행을 주제로 한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멤버 중 하나가 여울 씨였던 것이다. 처음 만났지만 우리는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고 매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따로 대화를 할 시간은 없었다. 파티가 그렇듯 사람들은 여기저기 분산돼서 누구는 앉아서, 누구는 서서 담소를 나누었고 나는 호스트기에 술과 핑거 푸드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계속 살피고 밑에 카페에 주문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어야 했기에 나름 가장 분주했다. 바쁜 와중에 그녀에게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긴 생머리에, 길쭉한 몸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웃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하얗고 투명한 사람

첫눈에 나는 당신의 맑고 투명한 기운에 마음이 끌렸다.

환하게 웃는 당신의 미소가 참 좋았다.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면서도 그녀가 있는 테이블에 낄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그녀를 포함한 세 명이 옥상 끝쪽 테이블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앉아 있던 의자를 쫄래쫄래 끓어서 그 테이블에 합석했다. 호스트의 장점은 어디에 껴도 다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자신은 아싸라서 나 같은 인싸가 끼는 게 매우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모습은 더욱 하얗고 투명했다. 특히 웃는 모습이 매우 예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절로 미소 짓게 되는 싱그러운 미소 그 자체였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사람들도 조금씩 취하고 나도 많이 웃고 많이 떠든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해가 지자 몇 명은 빠져서 여덟 명 남짓 인원이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2차 이야기가 나왔고 2차는 근처 노래방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멀쩡했는데 문제는 뒷정리를 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같이 일하는 동생에게 먼저 사람들을 데리고 가라고 해놓고 나는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빨간색 스미노프라는 술병이 있었는데 사람들과 클렌베리 주스에 타서 홀짝홀짝 마셨던 술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 보는 술이라 그게 몇 도인지, 얼마나 독한지 알지 못했다. 크렌베리가 맛있어서 그저 맛있는 술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병의 4분의 1 정도 남았는데 크렌베리 주스도 남아서 남아 있던 걸 모두 섞어서 한 번에 마시고 뒷정리를 마쳤다. 그 술은 보드카로 40%에 육박하는 센 술이었던 그때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사람들을 먼저 보내서 조금 늦은 나는 뛰어서 노래방까지 갔다. 그게 독이 되었다. 알코올이 갑자기 많이 들어간 데다가 뛰는 바람에 온몸으로 술이 퍼져 갑자기 취하게 된 것이다. 노래방에 도착한 나는 인사불성으로 신나는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이때부터 진상모드가 시작된 것이다. 노래방에 누가 왔는지 하나하나 기억은 안 나지만 여울 씨가 왔던 것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술에 취한 나는 누워서 자다가 갑자기 화장실에 가겠다면 나왔다. 지하 노래방에서 나와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화장실로 비틀비틀 향했다. 그런데 계단에서 여울 씨와 지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내가 듣기에 '버스가 일찍 끊겨서 집에 가야 한다'라고 여울 씨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도 정확히 몰랐는데 집에 간다는 말에 내가 오기를 부렸다.


화장실로 가다 말고 집에 가려는 당신을 잡고 “Don’t go home. Don't go home. Stay with me" 이렇게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술에 취하면 영어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데 도수 높은 술을 갑자기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집에 가지 말라며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 다니면서 술을 그렇게 마셔도 예의 없이 그렇게 진상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날 내가 생각하기에도 부끄럽게 그녀에게 들이댄 것이다. 하필이면 또 마음에 들어서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녀에게 첫 이미지가 진상남이 되어 버렸다.


진상남이 되어 버렸다

당시는 술에 너무 취해 다 기억을 못 하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내게 손목을 붙잡힌 그녀는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도 가지 못하고 한동안 붙잡혀 있다가 친한 동생이 "이 형 많이 취했네"하면서 손목을 떼어 내고 그녀를 풀어줬다고 한다. 그녀를 보내고 나도 바로 택시에 태워서 집에 보냈다. 그날은 어떻게 끝나는지 모르게 그렇게 끝이 나고 다음 날 나는 점심 늦게까지 잠이 들었다.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서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어제 파티에 참석한 친한 동생 정재였다. 정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나는 하루 아침에 완전한 진상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낯이 뜨겁고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아.. 그랬단 말이지? 아.. 정말.. 아.. 그래"

변명을 할 수도, 부연 설명을 할 것도 없이 그냥 술 취한 진상남이 되어 있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통화를 좀 할까? 사과를 할까?라는 생각도 짧게 했지만 연락하는 그 자체만으로 더 진상이 될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을 고이 접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느낌 좋은 사람이었는데 내가 너무 못난 짓을 해 버렸다. 너무나 아쉬웠지만 거기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억울하고 아쉽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 끝이 났다.


언제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시간이 흘러만 갔다.




Evoto-(1 of 1)_(4).png 그녀를 처음 만난 문래동 카페 치포리 옥상 ©2026. 직딩제스 All rights reserved



나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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