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가 끝나고 난 뒤
여보세요?
다음 날 오후 정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속은 좀 어때요?"
"머리 아파 죽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머리를 긁적이며 스피커폰으로 대답했다.
"근데 어제 기억나요?"
"응, 기억이 조금 나긴 하는데..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나 어떻게 왔어?"
"한진이형이랑 제가 택시에 태워서 보내드렸죠."
"아.. 그래? 고맙네."
숙취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보드카의 위력은 대단했다.
"형, 근데 어제 다른 건 기억나요?"
"왜? 뭐? 어떤 거?"
"아니.. " 정재가 뜸을 들였다. 나는 불안해졌다.
"형이 어제 여울씨 팔목 붙잡고 집에 가지 마라고 그랬잖아요. 막 영어 썩어 가면서.."
"....아"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 내가? 진짜?"
"예.. 형.."
"... 여울 씨는 뭐래?"
"뭐라 긴요. 저희가 팔목 풀어주고 집에 가라고 그랬죠. 근데 여울씨 손목이 빨갛더라구요."
식은땀이 났다. 손목을 잡고 있던 내 모습이 기억이 났다. 꿈이 아니었다.
"나 완전 진상짓 했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머리 텅 비어버렸다. 할 말을 찾다가 여울씨랑 같이 온 친구가 생각났다.
"광우는 뭐래?"
광우는 정재의 지인이기도 했다.
"광우형도 완전 난감해하죠. 자기가 파티에 데리고 왔는데..."
....핡....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순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이불 속이긴 했지만 더 숨고 싶었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진상짓을 한 것이다.
"미안하다. 진짜. 네가 좀 미안한다고 전해줘. 나는 아무래도 연락 안 하는 계 좋을 거 같아."
"그래요. 형. 속 안 좋으실 텐데 쉬구요."
전화를 끊고 나서 멘탈이 무너졌다. 멘붕 그 자체.
오랜만에 받은 떨리는 감정이었는데 나의 술주정으로 한방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 마음에 들 새도 없이, 기억에 남는 대화 한 줄 없이 진상만 떨다가 그녀를 날려 보냈다. '집에 가지 마 베이베'만 남긴 채..
아쉽고 속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을 방법이 없었다. 컴퓨터라면 Ctrl+Z를 눌러 실행취소 하고 싶었지만 돌이킬 수가 없었다. 차리라 없었던 일이라면 그녀와 다시 잘 될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그놈의 술 때문에 아예 없었던 일보다 더 못한 일이 되고 말았다.
폭망.
기대조차 할 수 없게 기회가 완벽하게 날아가 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떨림이었는데..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파티가 끝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 어머니께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는 10분, 뛰면 5분 정도. 그런데 늘 걸어가는 날보다 뛰는 날이 많았다. '5분만 일찍 나올 걸' 이렇게 매일 생각하면서도 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틈틈이 핸드폰을 보며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뛰고 걷고를 반복하다 버스정류장에는 도착한다. 버스정류장에는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 직장인들 그리고 젊은이들. 아침 출근 시간대에는 아이와 노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출근하거나 등교해야 하는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다. 그중에 나도 하나. 버스에 타서 자리라도 있으면 정말 행운인데 대부분 자리가 없다. 서서 가다 보면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지친다. 용마루고개를 지나 공덕역에 도착하면 나는 다른 버스로 갈아탄다.
공덕의 아침.
수많은 직장인들로 이미 거리는 바쁘게 움직인다. 비니지스 캐주얼이나 양복을 입고 쌤소나이트나 투미 가방을 메고 있는 직장인들. 여성 가방 브랜드는 봐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대부분 비슷한 복장에, 비슷한 톤의 옷을 입고 모두가 이리저리 바쁘게 걷는다. 나는 공덕시장에서 여의도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이미 만원이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본다. 버스 속에 탄 사람들 모두가 핸드폰을 본다. 마치 핸드폰을 보는 것이 공공예절인마냥. 버스가 마포대교를 건널 때 나는 눈을 창밖으로 돌린다. 드넓고 푸른 한강, 원효대교와 저 멀리 보이는 한강철교. 그 위로 지하철이 지나간다. 불그스름한 아침 햇살은 받은 한강은 언제 봐도 멋있다. 버스는 마포대교를 건너면 여의도 빌딩 숲을 이리저리 지나서 여의도 공원에 나를 내려준다. 여의도 도착.
직장인들 섬.
나는 이곳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나의 모든 시간이 이 섬에 갇혀 버린 것 같다.
그날 이후로도 나의 이중생활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야근이 없는 날에는 여의도에서 퇴근해 문래동 사무실로 다시 출근했다. 회사 앞에서 문래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교통은 편했다. 출근 때만큼이나 사람들로 빼곡한 버스를 타고 문래동 창작촌에 내려 가장 허름한 빌딩으로 들어간다. 동업하는 동생들과 간단하게 회의를 하고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밥을 먹으러 간다. 대부분은 내가 밥을 샀다. 회사에서는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게 좋아서 매번 밥을 샀다. 일탈 같았고 생기가 돌았다. 어쩌면 나는 사업 그 자체보다 퇴근하고 이렇게 술 한잔 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집에 혼자 가는 길은 너무나 쓸쓸하고 공허했다. 누군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하게 술 마시고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동업하던 동생이 자기 사무실을 따로 차린 것이다. 어른들이 '동업하지 말라는 이유가 이런 거였나?'하고 후회했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계획하던 것들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에서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스튜디오는 하루 종일 문을 닫아야 했다. 게다가 날이 점점 뜨거워져 낮에는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었기 때문에 선풍기 몇 대로 버티고 있었지만 6월이 되자 선풍기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싶었지만 아직 수익이 나지 않고 있었고 월세에 관리비에, 인터넷과 같은 고정비만으로도 이미 큰 부담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동업을 하면 그나마 좀 버틸 수도 있었는데 나 혼자 회사에서 번 돈을 스튜디오에 꼬라박고 있는 형국이니 더 투자할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장마가 찾아와 천장에 물이 새는 것이었다. 동생들이과 부랴부랴 컴퓨터와 책상을 벽 쪽으로 붙이고 한가운데 양동이로 물을 받고 바닥을 마대걸레로 닦는 작업을 계속했다. 밖에는 비가 퍼붓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그 처참한 관경을 보고 있자니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인에게 전화해 사무실을 빼겠다고 했다. 명분은 물이 새는 것이었지만 이미 나는 회사일과 스튜디오 일을 병행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수입도 나오지 않고 동업의 계획도 틀어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새고... 그렇게 내 생의 첫 사업은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화려한 루프탑 파티의 기억만 남긴 채 문래동에서의 도전은 끝이 났다.
문래동의 추억과 함께 그녀에 대한 관계도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는지 모든 게 잘 안 되던 그때 다시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문래동 이후 6개월 만이었다.
나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3화에서 계속
(매주 목요일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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