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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May 12. 2016

너와 나의 소원이 하늘 높이 날아가기를...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즐긴 대구 풍등축제

원래 대구에는 볼 일이 있어서 하룻밤 머물러 가기로 한 것뿐이었다. 조용한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잠만 자고 다음날 볼 일 보러 가야겠다,

- 라고 생각했더랬다.


하긴, 숙소 예약할 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관광지로 그리 인기있는 도시가 아닌데도, 전화를 거는 숙소마다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운 좋게- 딱 1자리가 비어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겨우 예약을 했다.


친구의 결혼식을 마치고 오후 느즈막히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외국인 게스트들이 많은 곳이었는데, 스탭과 모든 게스트들이 분주하게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도미토리 침대 한켠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같이 가시죠!"

스탭 한명이 다짜고짜 나를 문밖으로 이끌었다.


오늘 대구에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는 '연등축제'가 있다는 거다. 어머, 이게 웬일. 그 동안 여행다니면서 사원마다 조금씩 기부했던 동전들이 이렇게 복이 되어 돌아오는건가! 부처님이 나를 기억했다가 생일파티에 초대해주신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대구 연등축제, 한국 ⓒ제석천

이미 지하철역에서부터 엄청난 인파를 헤치고 왔는데, 대구 야구장은 이미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얼마 전 SNS에서 이 행사의 사진이 인기를 얻는 바람에, 이미 인터넷에서는 연등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뜨거웠다고 한다. 그 축제에 우연히, 볼일 보러 왔다 참가하게 된 나의 이 작은 행운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수많은 인파도 전혀 부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구 연등축제, 한국 ⓒ제석천

한 명창이 구슬프게 선창하는 아리랑에 맞추어,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풍등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신호탄처럼 떠오른 풍등 하나에 경기장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중앙 객석에서 속속들이 등을 띄워올렸다.

곧 수십 수백개의 풍등이 하늘을 뒤덮었다. 때마침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며 어둠을 끌고와 하늘은 검푸른 도화지 같았고, 바람을 타고 우아하게 비행하는 풍등들은 그믐밤의 반딧불처럼 하늘을 밝혔다.


하나 하나 사람들의 소원을 싣고 몸을 태우며 하늘로 날아오른 풍등이 만든 풍경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의 부족한 어휘력과, 내 눈을 따라잡지 못하는 핸드폰 카메라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게스트하우스 스탭이 미리 준비해준 우리만의 풍등을 날리기로 했다. 각자의 소원을 담아서.

대구 연등축제, 한국 ⓒ제석천

풍등을 하늘로 떠오를만큼 부풀리기 위해서는 한번에 많은 손이 필요했다.

뜨거운 공기가 가득 찰 때까지 아래위 모서리 곳곳을 잡고 있어야만 했고, 부풀어오르다가도 거센 바람 한방에 사그러들고마는 풍등을 지키기 위해선 바람을 가릴 몸도 필요했다.


만난지 한시간도 안된 여러 국적의 게스트들. 경기장에 올 때까지 거의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사람들이건만, 풍등 앞에선 달랐다.

한명의 풍등을 날릴 때마다 모두가 달라붙어 손을 보탰다. 언어도 다르고 생김새도 모두 달랐지만 서로의 소원을 지켜주려는 마음은 같았다.

둥실-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첫 풍등이 떠올랐다.

전라도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친다는 크레이그가 삐뚤빼뚤하게 쓴 <우주정복>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풍등이 나무를 피해 안전하게 흘러가는걸 확인하고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환호를 질렀다.



진심어린 소원을 적는 한국인들과 달리, 외국인 게스트들은 대부분 장난스런 소원을 적거나, 이름만 적고 말았다. 두어개의 풍등을 함께 날리며 어색함이 사라진, 스위스에서 나와 같은 직업을(!) 갖고있었다는 캐롤에게 물었다.


"넌 왜 풍등에 소원 안 적어?"

....

"풍등은 결국 하늘에서 불타 사라지잖아. 내 희망은 불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

풍등이 자기 몸을 태워 네 소원을 하늘에 전해줄거라고, 네가 믿는 신이 정말로 있다면, 그 소원을 전해받을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내 짧은 영어로 그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희망을 캐롤이 꼭 이룰 수 있기를 마음으로 빌어주었다.

내 풍등을 날릴 차례였다.

과묵한데다 수줍음도 많아 게스트하우스 스탭 말고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던 이태리 남자 지오메도 조용히 다가와 내 풍등이 데워진 공기를 잘 머금도록 지켜주었다.


풍등이 슬슬 제 몸을 키우기 시작할때쯤, 모르는 손이 쑥 들어와 한쪽 모서리를 잡아주었다.

저 멀리서 우리의 등 띄우기를 지켜만 보던 대구 소녀 한명이었다.


"저랑 소원이 같아서요..."


라고 수줍게 인사한 그녀도 나의- 아니, 우리의 풍등이 날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칠 때까지 손을 보태주었다.


우리의 풍등은 이전에 날려보냈던 것들보다 훨씬 더- 잘- 가볍게 몸을 띄웠고, 훨씬 높이 날아올랐다. 오늘 처음 만난 우리는 함께 박수를 쳤고, 함께 풍등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함께 바라보았다.

나의 별것 아닌 소원에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더해져 풍등이 더 뜨거워진 것이리라. 나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어서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겨우 한시간. 풍등을 함께 날린 것 뿐인데 우리 일행은 마치 며칠을 함께한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다. 아름다운 연등 퍼레이드까지 함께 구경한 뒤, 돗자리를 깔고 치맥을 먹고 마셨다.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수다는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연등 축제는 아름다웠지만, 찰나처럼 짧았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날 역시 이제는 지나가버렸고.

서로의 소원을 지켜주었던 우리는 여느 여행자들처럼 서로의 행운을 빌며 쿨하게 헤어졌다.


아마도- 이변이 없는 이상 이 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만,

나의- 아니,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왔던, 겨우 하룻밤을 함께 보낸 외국인 친구들과, 같은 소원을 함께 빌었던 대구 소녀 모두, 그들의 소원이 이뤄지는 그 날엔 한번쯤 나를 떠올려주기를.


아.. 그러고보니 크레이그는 우주정복 못할 것 같은데... 날 영원히 잊는대도 이해해줘야겠네.


some pictures provided by

Amy, Caroline and Cra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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