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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Apr 28. 2016

돌아갈 방법이 없을 땐 어떻게 하죠?

태국 북부 소도시 '난 Nan'에서의 좌충우돌 여행기 (2)

여행책자엔 늘- 가는 길만 나와있다.


여행 안내소에서 길을 물어도 당연히- 가는 법만 알려준다. 길이란 보통 갔던 그대로 되짚어 올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행을 하다보면 종종 가는 길과 오는 길이, 아니 정확히는 가는 방법과 오는 방법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배낭여행 선진국(?)이라는 태국인데도, 종종 그런 일이 발생한다.


태국 어디서나 엽서로 만나볼 수 있는 '왓 푸민'의 벽화- Nan, Thailand  ⓒ제석천
나를 난Nan으로 오게 만들었던 이 그림.

난 시내의 왓 푸민에서 만났던 이 그림의 연작들이 있다는 소식에 근교 여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영어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이 도시에서의 근교 여행이 또 어떤 사건사고(?)를 일으킬지- 조금은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책자에서 나온대로 "차장에게 얘기하면 근처에 내릴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오토바이택시를 잡을수도" 있겠지만, I am a girl, you are a boy 도 통하지 않을 이 태국 제일의 영어불모지에서 이 불안한 정보만 가지고 무턱대고 시외로 나가기는 겁이 났다. 하지만 이 그림 보자고 난에 온 건데 포기할 순 없고...

결국, 그림을 보고싶은 욕심이 이겼다. 자전거를 빌렸던 카페 사장님에게 가는법을 묻기로 했다.



어여쁜 알바 언니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Hello" 라고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밝디밝던 알바언니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노 잉글리쉬" 라며 손을 훼훼 저었다.
오마이갓.... 이 도시에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은 정녕 이 카페 사장님 한명 뿐이란 말인가!

내가 아는 모든 바디 랭귀지와 주변의 모든 사물들을 동원한 끝에, 사장님과 통화 연결이 되었다. 교외의 '왓 농부아'에 가고 싶다는 우리 얘기에, 사장님은 잠깐 기다려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는 그 후로도 한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 알바 언니와 서로 민망한 시선을 교환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것마저 민망해지던 때쯤, 사장님이 직접- 가게에 왕림하셨다.


'왓 농부아'에 가는 건, 전화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우리가 가진 지도 + 사장님이 가진 지도를 전부 펼쳐놓고 한참을 논의했다. 썽태우나 모터싸이(오토바이 택시)는 법적으로 시외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개인 승용차를 이용하려면 무조건 운전기사와 함께 렌트해야하는데, 그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비용이었다. 결국, 시외로 운행하는 완행버스와 튼튼한 두 다리, 그리고 '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언제 만들어졌을지 그 역사를 짐작도 할 수 없는 오래된 완행버스- Nan, Thailand  ⓒ제석천
정말 '완행' 버스였다.

카페 사장님이 일러준 시각에 맞춰 도착했지만, 터미널에서 30분이나 기다려서야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출발하고 나서도 털털거리며 시속 30km도 안 될 것 같은 속력으로 동네를 한바퀴 다 돌고 출발하는, 정말 느리고 느린 버스였다.


그런 완행버스여서,

너무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낑낑대며 겨우 열어야하는 창문이었지만, 그 틈새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끝없이 펼쳐진 초록의 풍경은 길고 긴 교외로의 여정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영어라곤 원 투 쓰리도 모르는 기사님이었지만 다행히 '왓 농부아' 라는 말은 알아들어, 근처 마을 입구에 버스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원 투 쓰리를 모르니 버스 막차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이미 태국 여행한지 꽤 된 터라, 간단한 태국어는 무리없이 할 수 있었건만... 하필 시간을 안 익혀둔게 그렇게 한이 될 수 없었다. (태국어로 시간은 숫자와는 말이 아예 다르다.)

시계를 가리켜보고 손으로 시침분침도 만들어보고 별짓을 다 했지만 막차 시간도 배차 시간도 알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돌아오는 버스 역시 이 앞을 지나가는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사 아저씨와 우린, 단 한 마디도 소통하지 못하고 서로 미안한 표정으로 진땀만 흘리며 헤어졌다. 모래바람을 날리며 털털털 사라져가는 버스의 뒷통수가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운이 좋으면' 오토바이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에게 그런 운이 있을리가 없었다.


나름 노점들이 모여있는 대로변이었고 사람들도 꽤 많았지만, 땡볕에 서서 한참 주위를 둘러봐도 오토바이 택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도 히치하이킹이란걸 할 때가 됐나...


개인적으로 히치하이킹은 선호하지도 추천하지도 않는 여행법이지만, 이번엔 웬지 해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여행 내내 겪은 태국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믿음이랄까- 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내가 겪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호의적인 편이다. 태국을 진짜 여행자의 천국으로 만든건 이 사람들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나가던 사람에게 우연한 도움을 받은 적도 몇번 있어서, 웬지 여기서만큼은- 더군다나 영어도 안 통하는 때 묻지 않은 이 도시에서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길 가자고 우린 그렇게 히치하이킹을 했더랬다...- Nan, Thailand  ⓒ제석천

나보단 씩씩한 친구가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었다. 물론,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짧은 태국어와 영어를 섞어 길을 묻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더니 어디선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정말로 정말로 아주 조금이었지만 이 영어불모지에서 그게 어딘가!) 사람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아마도 그 동네에서 유일할, 영어를 아는 아저씨를 불러다 주었다. 그리고 모두가 우릴 둘러싸고 우리가 목적을 이룰 때까지 흐뭇한 표정으로 아저씨와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영어가 만났지만, 뜻은 통했다. 검은색 미니트럭을 가진 아저씨가 흔쾌히 왓 농부아 입구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대신, 중간에 어딜 들려야 하니까 기다리라고 했고- 우린 그쯤이야, 당연히 오케이였다.



아저씨는 아마도 집을 짓거나 수리를 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앞자리는 부자재들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린 트럭 짐칸에 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차가 달리는 내내 상쾌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건 물론이고, 대학시절 농활에서의 추억이 겹쳐지면서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공사 중인듯한 집에 잠시 들른 꽤 오랜 사이, 우린 끈기있게 짐칸에서 기다렸다. 아쉽게도 아저씨에게는 가림막 한점 없는 오픈-트럭카를 그늘에 세워줄만큼의 센스가 없었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달구어진 까만 트럭 위에서 구운 오징어 신세가 되어야 했지만- 그 고생의 댓가로 아저씨는 우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왓 농부아'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예상보다는 신나는, 힘든, 긴 여정 끝에
왓 농부아에 도착했다.

왓 농부아에는 우리를 난으로 이끌었던 그 그림의 수많은 시리즈들이 있었다. 바로 옆에는 전통 그대로 직접 직물을 짜고 수를 놓는 마을 '반 농부아'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많이 흐려져버린 벽화들은 우리의 환상을 만족시킬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방문이 적은 만큼, 번잡스러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까치발해가며 볼 필요가 없어 좋았다. 그림에서도- '반 농부아'에서도- 오래 전 태국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결국은, 늘 그렇듯, 모든 그림은 교과서나 엽서에서 볼 때가 가장 아릅답다.


벽화 짜투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경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 사람이 그렸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많고 또 세밀한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원하던 목표를 성취했다는 만족감도 잠시, 곧 우리 머리속에 의문 하나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떻게 돌아가지?
버스를 못 만나면 어떡하지?


그 때부터는 어떻게 사원을 돌았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른 관광객이라도 있으면 좀 의지해볼까 두리번거려 봤는데, 외곽에 위치한데다 평일이어서인지 사원 안에는 개미 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반쯤 멍하니 왓/반 농부아를 무의미하게 두어바퀴 돌았을때... 까만 머리의 관광객 무리가 나타났다! 오, 아까 여행의 운을 빌며 불상 앞에 바쳤던 동전 한닢의 힘이 나타나는 걸까, 아무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여자 서너명뿐인데 가이드까지 동행한걸 보니, 럭셔리한 일본 여행객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관광객 서너명에 가이드라면... 분명히 차는 있겠지!



처음부터, 그들이 타고 온 차가 목적이었지만, 초면이니까- 예의 있어보이려고 시내로 가는 대중교통편을 물었다.


놀랍게도 -나의 눈썰미가 이렇게 꽝이었나 싶어 놀랐다- 그들은 다른 지방에서 온 태국인들이었다.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 하는 그녀들은 이 지방 사람이 아니어서 교통편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흔쾌하게, 자신들이 타고 온 차가 있으니 태워주겠다고 했다.


Nan 공항에서 방콕으로 이동할 예정이라는 그녀들은 말로만 듣던 태국 부자였다.... 여자 넷이 기사 딸린 최신식 밴을 렌트한 것도 모자라 -한국 태국을 통틀어 그렇게 좋은 차는 처음 타봤다- 비행기를 타고 난과 방콕을 오가다니... 썽태우 아저씨랑 10바트 때문에 한참을 실갱이하는 우리와는 천지차이구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관광 홍보영화 ⓒ제석천

그때도 이미 한류가 동남아를 휩쓸고 있을 때라, 그녀들도 한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my car (라고 말했다...)'에 한국 사람을 태웠다는걸 너무 신기하고 또 신나했다. 자기 차에 한국 영화가 있다며 틀어주었는데, 일본 여배우와 한국 남배우가 함께 찍은 한국관광 홍보용 영화였다.

배우들이 동대문 시장에서 족발을 뜯는 모습을 보고, 정말 저기 가면 저게 있냐고 물었고, 자기는 이미 한국에 다녀왔는데 저런걸 못 봐서 아쉽다고 했다. 아이돌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했다. 누군지는 기억 안 나지만, 연예인들이 국위선양 하나는 제대로 하는구나 싶었다.


시내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공항까지 한두시간. '이런데 공항이...?' 라는 의문이 생기는 허허벌판에 있는 공항 앞에 우릴 내려주고 그들은, 멋있게, 떠났다. 우리가 공항 앞에서 낮잠자고 있던 썽태우 아저씨와 흥정을 하는 동안, 그들을 실은 비행기 (설마 my plane은 아니겠지...)는 저 하늘 멀리로, 멋지게, 사라졌다.

그녀들아 안녕. 프로펠러 보니 정말 her plane 맞는것 같기도 하고... ⓒ제석천


결국-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

가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

이 여정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난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물었던 것도 아닌데, 많은 에피소드와 추억거리들이 있다.


그건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에서 부딪힌 모든 사람들이 이 낯선 외국인에게 친절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자전거 타고 차와 너무 가까이 지나갔다고 경찰서 가자고 했던 그 아저씨 한명은 빼고싶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날 구해준 것도 지나가던 다른 현지인 아저씨였으니 +-0 인셈 치자.)


아쉽지만 이 순수하고 친절한 도시도 아마도 다른 여행지들처럼,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거쳐가고 나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며칠동안 만났던 난 사람들- 낯선 이방인에게 순수한 호의를 베풀었던 이 사람들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언젠가, 오랜 시간 뒤에, 난을 다시 찾더라도- 내가 그리도 보고싶어했던 저 벽화들의 색이 더 바래어 희미해져버린대도- 이 '사람들' 만큼은 그대로이기를.



(이 글은 좌충우돌 난 여행기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jesuckchun/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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