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빙과 여행으로 세부 CEBU 한 바퀴 (2)
필리핀 보홀,
뜨거운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썸머 크리스마스'라고 할 때마다 호주 같은 남반구 나라들을 떠올렸는데, 생각해보니 동남아시아에서도 늘 여름 날씨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물론, 현지 사람들에게는 겨울 날씨지만.
필리핀은 천주교-정확히는 카톨릭-를 국교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매우 중요한 국경일이다. 게다가 곧 있으면 필리핀 사람들이 1년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절, 연말연시도 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연말로 이어지는 시기(실은 12월 한달 내내)의 필리핀은 항상 축제분위기로 가득차 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데리고 올 석양이 뉘엇뉘엇 넘어간다. 사람들은 해가 지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바다를 즐긴다.
평균 2주간의 길고 긴 연말 휴가를 즐기는 유럽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휴일인 크리스마스가 하필 주말인 올해- '연말 휴가'라는 개념 자체도 없는 한국에서 온 내가- 이들과 함께 뜨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회사를 그만두고 화려한 연말을 선물한 나 스스로가 참 고맙다.
1년 365일 관광객들로 붐비는 아로나 해변이지만, 이 기간은 좀 더 특별하다. 해변가의 모든 식당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별을 비롯해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온갖 장식들을 내걸고 이른 저녁부터 불을 반짝인다. 점원들도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지만 하얀 털이 달린 산타 모자 쓰는 것은 잊지 않는다.
아로나비치는 백사장에 테이블을 얼마나 놓았느냐에 따라 고급 식당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곳이다. (...내 느낌상 그렇다.) 비싸고 럭셔리한 레스토랑일수록 넓은 백사장에 더 많은 테이블을 놓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언제나 가장 먼저 손님이 들어차는 곳은 바다를 볼 수 있는 백사장 쪽이지만, 오늘은 이곳저곳 가릴 데 없이 사람들이 꽉 꽉 들어차 있다.
어디선가 리드미컬한 타악기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발길을 돌려보니, 벌써 사람들이 빼곡히 주변을 애워싸고 있다. 아마도 '럭셔리한' 레스토랑 중 한곳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쇼단을 부른 것 같다.
테이블에서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할 수 없어 멀리서 까치발을 해가며 겨우겨우 쇼를 구경했다.
필리핀 전통 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뜨거운 불이 담긴 통을 아크로바틱 같은 동작으로 돌려대는 모습이, 하루이틀 수련의 결과는 아닌 것 같다. 마샬아츠와 곡예를 접목한듯한 날랜 동작들에 연달아 박수가 흘러나온다. 단원 한명이 벗어놓은 모자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은 풍성한 전세계 인심들이 그득그득 담겨지고, 쇼단의 동작은 더욱 격렬해져간다.
아로나 비치를 가득 메운 수많은 인파와 축제의 열기를 조금 더 즐기고 싶었지만, 웬지 이대로라면 이 열기가 밤이 새도록 식지 않을 것 같아 일찌감치 발을 돌렸다. 사람 많은 곳이라면 서울로도 충분하니까.
이런 날은 관광지를 벗어나는게 제일이라며, 다이빙샵 강사님이 우리를 필리핀 사람들이 주로 찾는 현지 식당으로 이끌었다. 짭쪼름한 꼬치 구이가 일품인 곳이라는 말에 모두가 부푼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식당의 불은 켜져 있지만 문이 닫혀있고, 안에서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다. 사장 아주머니가 우릴 보더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라 장사는 하지 않고, 모든 가족들이 모여 파티 중이라고 한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아줌마 아저씨 여러명과 꼬맹이들까지 모두 모여 신나게 노래하며 춤 추고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든 웰컴이야~ 라며 함께 파티를 즐기자고 했지만, 괜히 외국인들이 쳐들어가 가족 파티를 망칠까 겁나 소심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안으로 찾은 식당은 역시 꼬치구이집. 입구에서 재료를 고르고 값을 치르면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꼬치구이가 자리로 배달되어 온다.
전깃불 하나 없이 어두운 식당 내부. 양초가 든 등불로 겨우 겨우 자리를 비추어가며 식사를 해야했지만, 그 모든 악조건을 잊을만큼 맛이 있었다. 모든 꼬치구이 식당의 양념은 그 집만의 비법이라 집마다 맛이 천차만별이고 그 누구에게도 그 비밀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집은 아주 아주 성공적!
훌륭한 크리스마스 만찬을 마쳤지만, 사실 필리핀 크리스마스 하이라이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불꽃놀이
혹은 폭죽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이것.
필리핀도 중국인들의 영향이 매우 큰 나라라서, 어느 동남아 국가가 안 그러겠냐만은, 중국식의 폭죽 문화가 매우 발달해 있다. 특히 중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지인 이곳 보홀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면 부유한 중국인들이 일정 금액을 리조트에 지불하고 화려한 폭죽쇼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작년만해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늘에 해가 떴나~? 착각할 정도로 수많은 폭죽과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고 하던데... 연말에는 자정, 크리스마스에는 9-10시경에 주로 폭죽이 집중(?)된다고 한다. 우린 그 천지개벽쇼(?)를 보기 위해 만찬 후 조용한 백사장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은 잠잠했다.
세계적인 불황이라더니... 필리핀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다행히, 11시가 넘어서자 보홀에서 가장 큰 리조트가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정말 불황은 불황인가. 작년에 비하면 이 정도는 불꽃놀이도 아니란다. 기대하던 천지개벽 수준의 쇼는 아니었지만, 하나 둘 하늘에 꽃을 피우는 폭죽들은 크리스마스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다웠다. 연말을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는 이 여행자의 눈에 그 무엇이 아름답지 않겠냐마는.
따뜻한 날씨, 철썩이는 파도 소리, 발가락 사이로 곰실거리는 고운 모래, 함께 해변에서 불꽃을 구경하는 서너명의 필리핀사람들...
왁자지껄 바글바글한 한강 불꽃축제가 결코 부럽지 않은 이 밤.
크리스마스 축제의 밤은 화려한 소박함 속에서,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 모알보알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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