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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Jul 29. 2023

낡은 오페라, 새로운 무대 연출

공연예술의 현대적 재구성

휴대폰을 반납한 뒤 우리의 일상은 TV 속 아이돌을 돌려 보는 것이고, 여느 날과 똑같이 흘러가던 어제의 밤 채널엔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방영되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는 순간 “결혼행진곡”의 첫 마디가 시작되고 있었다. 익숙한 작품을 새로운 공간에서 보는 일은 반가움과 묘한 불편함을 수반하기에,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편함 탓인지, 온갖 상념들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곤 한다. 휴대폰이 있고, 드라마와 영화, 어쩌면 뮤지컬이 있는데도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나는 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시간이 한때의 유행을 낡은 것으로 만들고 자신보다 뒤처지는 것을 집어삼킬 때,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야 하는 법이다. 마이크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의 극작가는 벨칸토 창법과 레치타티보를 고수하지 않아도 되었고, 결국 오페라는 구시대의 공연예술이 되었다. 이제 오페라의 생명력은 새로 주어질 수 없게 되었고, 이미 만들어진 작품들의 반복을 통해서만 연장될 수 있었다.


우리는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를 보며 그것을 고정불변한 실체로 믿지만, 사실 오페라의 세트는 그 무엇보다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모든 공연은 과거와 미래와의 상호작용이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부르며 작품이 잊히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똑같은 무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연의 무대는 고유한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인간의 가치는 변화한다. 그리고 다시 상영되는 작품은 새로운 시간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처음으로 오페라를 본 파리 가르니에의 박스석에선 옛 시대의 정취가 흘러나왔고, 커튼 너머로 펼쳐진 <플라테>의 무대엔 현대 극장의 좌석들이 서 있었다. 그곳에서 고대 시인 ‘테스피스’는 극장을 헤엄치며 젊은이들의 가벼운 사랑을 질타했다. 고대 로마의 카라칼라에서는 <카르멘>이 미국-멕시코 국경을 배경으로 상연되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미지의 여인 ‘카르멘’의 이야기는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의 삶으로 각색되었다. 그 덕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카르멘의 사랑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민자의 정체성으로 확대되었다.


<플라테>. 현대 오페라좌를 배경으로 활용하여 고대와 신화 속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진 출처: Programme TV)
카라칼라에서 상연된 <카르멘>. 원작에서는 군인인 ‘돈 호세’가 공연에서는 미 국경수비대원으로 나온다. (사진 출처: Ketevan Kemoklidze SNS)


대구국제오페라페스티벌에서 상연된 <라인의 황금>에서는 연출가 요나 킴이 대형 스크린을 도입하는 한편, 무대 내부로 카메라를 전개하여 공연예술에 1인칭 시점을 도입하였다. 일상과는 구분된 신화의 개연성을 설득시키는 대신 그는 그 거리감을 부각하고자 했다. 그리고 관객은 공연예술의 관례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시드니에서 관람한 연극 <맥베스>에서는 무대 장치로 초록색 커튼 하나만을 사용하였다. 중세의 권력다툼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초록 커튼에 응축되어 인물들은 단지 그 앞뒤를 오갈 뿐이었다. 커튼을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스크린과 1인칭 시점의 도입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라인의 황금>. (사진 출처: Nationaltheater Mannheim)
초록 커튼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는 연출을 보여준 시드니의 <맥베스> 공연. (사진 출처: Sydney Opera House)


오래된 작품의 성공가치는 단 하나, 살아남는 것이다. 오늘도 새롭게 대학가, 웨스트 엔드, 브로드웨이에서는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성공한 작품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외 공연을 하고, 매년 재연된다. 주연 배우는 온갖 TV 프로그램과 언론사 인터뷰에 참여한다. 꿈의 도시는 새로운 꿈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작품은 범람한다. 그리고 오페라는, 오래된 연극은 그들에 맞서야 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현대인의 일상과 가치를 부각하고 현실적인 무대를 만들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단지 미약하지만 작품 전체를 변화시키는 무언의 내러티브, 무대 연출 하나 뿐이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닿고자 하는 우리의 고민은 결국 무대 연출의 모든 것,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가? 관객들은 끊임없이 반문한다. 영화와 뮤지컬 대신 오페라를 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작품에 어떻게 몰입하는지,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대 기획은 결국 오페라의 낯선 맥락을 해석하여 현대의 맥락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며, 관객들이 현실의 요소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그 예로, 도시 하층민의 비극적인 사랑을 주제로 하는 <라 보엠>은 옥탑방을 무대로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청춘의 이야기로 치환될 수 있을 것이다. 환락의 테마와 순례자의 테마가 대립하는 <탄호이저>의 경우에는 이상향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하게 되는 청년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현대인과 공유하는 맥락을 부각하는 것이지, 무대를 현대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예술적 경험 내지는 감성의 개발은 그 다음의 목표이다.


모든 예술에는 이유가 있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서든, 창작배경에서든 예술가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심지어는 ‘예술가’의 전지전능한 권위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또한 ‘모더니즘의 전복’ 내지는 ‘우연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도는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작품을 볼 때 우리의 초점은 자연스레 예술가의 의도를 향한다. 그래서 예술가가 무엇을 의도했고 무엇이 성공했는지, 같은 범례의 작품들 사이에서 이 작품이 구현해낸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사실, 공식화된 무대를 반복하는 공연예술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렇게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작품을 볼 때면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괜한 데에 나의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는 후회가 밀려오는 탓이다. 안타까운 점은, 고전을 재연할 때 치밀하게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전에 시도되어 정착된 무대 연출을 반복하고, 작품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피터 브룩의 말마따나 ‘죽은 연극’이 생명력을 요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그럼에도 예술은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대단한 극단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작품에 새로이 불어넣을 수 있는 생명력은 무궁무진하다. 원작은 보여주고, 극단은 각색한다. 극단이 공연하고, 관객은 그들의 결과물을 본다. 그 순간에 세계에는 단 하나의 <페드르>만이 존재한다.  어린 마르셀의 기대에 못미친 그 <페드르>도, 청년 마르셀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그 <페드르>도 우리의 감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날 공연이 좋았다면 그것은 극단의 성과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극단의 실패이다. 누구도 그들의 고민을 알아주지는 않는다, 섬세하게 설계된 연출이 아니라면. 오페라의 생명력을 연장하고자 하는 그들의 고민은 오로지 무대를 통해서만 관객에게 닿을 수 있다. 예술은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오페라가 정말로 재미있는 문화콘텐츠라면, ‘쉽게 이해하는 오페라’, ‘알고 보면 재미있는 오페라’라고 떠들어댈 시간에 정말로 재미있는 오페라를 보여주면 된다. 말로써 확보한 생명력은 쉽게 소진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여주어야 한다. 공연예술은 언제나 보여지는 것이 전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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